사람은 때때로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거나,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한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흔히 말하는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내로남불`식으로 입장에 따라 지극히 다른 해석을 하고 싶어 한다. 남의 잘못은 가감 없이 쉽게 얘기하는 반면, 자신의 과오에 대해서는 남의 탓으로 돌리는 착각의 오류를 범한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두고 `기본적 귀인오류(fundamental attribution error)`라고 설명하고 있다. 매번 외부의 `탓`을 하다 보니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대응하는 방식에 오류가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오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누군가의 잘못된 행동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인식을 새롭게 정립하는 즉, 1960년대 중국 문화혁명 때에 마오쪄둥(모택동)이 처음 사용한 것으로 전해지는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반드시 필요하다.

작금의 언론에 비친 모습들은 혼란스럽다. 이미 정치적, 법적으로 정리되고, 국민적 합의가 형성된 역사적 사실이 국민적 갈등 유발의 이슈로 떠오르고, 민주적 절차를 거쳐 탄생한 현 정부에 대한 국민의 평가가 우향곡선으로 향하니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또한 정파끼리는 진영논리에 얽매여 명분이 약한 공방에 여념이 없고, 국회는 국가와 국민의 미래에 대한 걱정을 뒤로 한 채 파행을 관행으로 여기며 위로를 삼고, 국민들의 삶의 현장에서 아우성대는 실험적 정책들의 성과(?)에 대해서 아랑곳하지 않고 비이성적 합리화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려스럽다. 과연 지금의 혼란스러움이 과거에는 없었을까?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면 한번 쯤 읽어 봤을만한 역사철학의 명저로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있다. 여기서 카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한다. 그래서 역사가의 역할은 `과거`의 사실을 `현재`에 입각하여 의미 있게 재구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역사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만 우리가 밟아온 과정을 되돌아보며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갈 원동력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인간 개개인의 행동은 역사라는 거대담론으로 확장될 수 있기 때문에 본이 되지 않는 남의 잘못된 행동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는 지혜로움이 요구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잘못된 것을 알면서 은연 중 배워서 따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남의 잘못된 행동을 보고 내 언행의 갈피를 다잡는 사람들도 있다.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 "무엇을 보고 생각했느냐"보다는 "무엇을 보고 깨우쳐 실천했느냐"가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언젠가 한 신문기사에서 읽은 내용이 새삼 기억이 난다. "잘못된 행동임을 알지만 반성(반면교사)할 능력이 결여된 사람이 사이코패스(psychopath)"이며 이들은 절대 하지 말았어야 할 후회되는 결과를 반면교사로 삼지 않고 또다시 잘못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이 정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만큼 우리 사회가 반면교사에 소홀하고 좌표를 잃은 모양으로 균형감을 상실해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현재의 모습을 과거에 투영해 보고 올바로 직시하지 않으면 우리 사회가 방향감각을 잃은 사이코패스처럼 온정 없는 괴물로 변할까 염려스럽다.

역사 속에서 반복되는 오류와 과오는 역사의 올바른 진화를 위해 더 이상 반복되지 않도록 하자. 그리고 온당치 않음에 굴복하지 말고 흔들림 없이 굳건하게 깨어있는 시민으로 맡은 바 역할을 다 하도록 하자. 분명한 것은 과거에 대한 반면교사는 내일을 위한 방향을 세울 수 있는 좋은 지표이며 작금의 사회 전반에서 펼쳐지는 우리의 모습이 후대에 부끄럽지 않은 행동인지를 반성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부디 어제로부터 배우는 오늘과 내일이 이어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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