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부터 내가 매달리고 있는 주제는 박상륭의 소설세계를 질 들뢰즈의 내재적 일의성의 시각으로 읽어보려는 것이다. 내재적 일의성이란 질 들뢰즈의 존재론을 대표하는 개념이다. 먼저 일의성을 보자. 들뢰즈의 개념 중 가장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일의성`이다. 일의성을 `단 하나` 혹은 `일자(一者)`로 보는 시각인데, 알랭 바디우나 슬라보이 지젝이 대표선수들이다. 그런 이해는 유목주의자 들뢰즈가 물리치려는 정착적 시각들이다. 들뢰즈의 일의성은 상위 원리에 따른 위계성에 반대한다. 일의성은 평등과 다양성, 차이를 긍정한다.

들뢰즈의 존재론을 잘 설명하고 있는 저작은 68혁명이 일어난 해에 발표된 `차이와 반복`이다. 문학을 하는 내가 들뢰즈를 얼마나 이해하겠는가마는 만약 누군가 나에게 `23권에 달하는 들뢰즈 저작들 중 단 한 권만 읽어야 한다면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가`고 질문한다면, (가장 야만적인 질문이겠지만) 나는 고심 끝에 이 책을 추천할 것 같다. 이 책의 말미에 들뢰즈는 심오하고 경이로운 말들을 하고 있다. `개방성은 일의성에 본질적으로 속한다.` `존재를 언명하는 것은 차이 자체이다.` 이 짧은 문장들은 명징한 이성적 성찰 안에 존재에 대한 넘치는 애정을 품고 있기에 주체할 수 없는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이성과 감성은 대립하지 않고, 들뢰즈의 개념인 `강렬도`를 달리하는 차이 자체로서 일의적이다. 이성과 감성은 서로를 지탱하고 보충한다. 예술을 하는 사람은 이성과 감성을 함께 발전시켜야 한다. 그래야 예술이라는 나무에서 잎 한 장을 딸 수 있다.

이제 `내재적`이란 측면을 살펴보자. `내재적`과 `일의성`은 분리할 수 없는 개념이지만, 편의상 그렇게 할 뿐이라는 점에 유념하자. 차이와 일의성은 얼핏 보면 존재론적으로 병립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렇지 않다. 여기서 다시 `강렬도`라는 개념을 빌자. 물이 빙점을 통과하면 얼음이 되고 기화하면 수증기가 된다. 물과 얼음, 수증기는 일의적이어서 각각 다른 강렬도라는 차이를 지닌 채 서로 같다. `H2O`라는 존재 안에서 그 존재의 형식들인 물, 얼음, 수증기는 내재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차이를 지닌 존재자들이다.

`내재적`의 반대는 `외재적`이다. 다른 예를 통해 정리해 보자. 우리의 아이들은 성적이라는 외재적 개념을 통해 존재를 부여받아선 안 된다. 성적이라는 `외재적` 기준은 아이들을 서열로 나누고 우열을 가린다. 내재적 일의성의 차원에서는 모든 아이들이 평등하다. 평등은 `차이` 그 자체를 인정할 때 실현된다. 지역 담론도 마찬가지다. 내재적 일의성. 존재론적으로 이 개념에 가장 부합하는 분야가 문화예술이다. 내재적 일의성에 대한 들뢰즈의 교훈은 더 남았다. 내재적 일의성의 존재론에서는 각각의 존재자들이 `과잉의 상태`에 도달해 있어야 한다. `과잉의 상태`란 무엇인가. 역량을 넘어서려는, `~되기`에의 기투다. 다시 한 번 우리는 문화와 예술의 본질인 `창조성`으로 회귀했다. 차이를 낳으며 끝없이 반복되는.

류달상 작가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