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다양한 문화행사들이 전국 각지에서 기획되고 있다. 때맞춰 최근 충청남도는 항일 지사인 면암 최익현(崔益鉉, 1833∼1906) 선생의 초상화와 그를 체포해 일본으로 압송해 가는 장면을 그린 <청양 최익현 압송도>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한다고 밝혔다.

조선말 관료였던 최익현은 기울어가는 왕조를 위해 의병을 일으켜 항일 투쟁에 나선 인물이다. 그는 절대 권력자였던 흥선대원군을 비판하는 상소를 거듭해 올렸으며, 1876년 일본과의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자 광화문 앞에 도끼를 들고 나가 `차라리 내 목을 치시오`라는 뜻으로 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렸을 만큼 결기가 높았다. 위기 때마다 행동에 나섰던 그에게는 유배와 구금의 시련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청양에 낙향해 있던 시절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다시 구국운동에 나서게 되었고,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73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의병을 모아 전북 태인에서 항전에 나섰다. 그러나 1906년 6월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대마도로 압송되었고 그곳에서 단식 4개월 만에 순국하였다.

많은 애국지사 가운데 유독 그의 초상화가 많이 전한다. 이번에 충남 유형문화재 제248호로 지정 고시된 것을 비롯해 국립제주박물관 소장본(보물 제1510호), 청양 모덕사본(충남 유형문화재 제231호), 화순 춘산영당본(전남 유형문화재 제313호), 곡성 오강사본(전남 문화재자료 제281호), 하동 운암영당본(경남 문화재자료 제513호), 경기도 포천 채산사본 등 알려진 것만 해도 7점 이상이다. 대부분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채용신(蔡龍臣, 1848~1941)의 화풍으로 제작된 것들이다. 이렇게 많은 초상화가 제작된 까닭은 무엇일까? 채용신은 1900년 태조를 비롯한 여섯 임금의 어진(御眞)을 모사하였고, 1901년에는 고종의 어진을 맡아 그렸다. 그 공으로 충남 정산(定山, 현재 청양)의 군수가 되었고 그곳에서 최익현과 인연을 쌓게 되었다.

자존의식이 높았던 최익현은 의거를 앞둔 1905년 채용신에게 초상화를 의뢰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국립제주박물관 소장의 초상화는 흰 두루마기에 털모자를 쓴 노인의 행색이지만 명암법을 살려 그린 눈매와 꾹 다문 입에서 결연한 의지를 느낄 수 있다. 생전의 인연으로 채용신은 최익현의 사후에도 그의 영정을 거듭 제작하였다. 얼굴 초본을 바탕으로 관복 차림의 초상에서부터 심의를 입은 초상 등 여러 본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초상화들은 항일투쟁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전국 각지의 사당에 모셔졌다. 면암이 태어난 경기도 포천과 말년을 보낸 충남 청양, 경주 최씨 가문에서 관리 중인 경남 하동의 영당과 의병 활동을 같이 한 제자들이 세운 전남 화순과 곡성의 영당 등에 봉안되어 오늘날 까지 전하는 것이다.

채용신이 그린 면암의 초상화는 전통의 초상화법과 서양화법을 절충한 근대기 초상화의 수작으로 꼽힌다. 그러나 화풍 이외에도 주목할 것은 항일운동의 큰 족적을 남긴 최익현의 초상화가 격동의 시대에 민중들에게 항일정신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자료로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미술문화재연구실 학예연구사 박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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