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도시의 역사가 통째로 날아간 듯한 감각을 지닌 지 오래다. 내가 사는 대전이라는 도시 이야기다. `대전 방문의 해`라는 말이 자주 들려오는 요즘이지만, 정작 방문해서 만나야할 대전의 자료는 도서관이든 관공서든 거의 준비되어 있지 않다. 어떤 씁쓸한 기억이 떠오른다.

6,7년 전의 이야기다. 대전의 모 예술기관에서 관련 예술인들을 모아 집담회 같은 걸 가진 적이 있다. 공식적인 회의가 아니라, 아이디어를 얻기 위한 비공식적 자리였다. 참석한 예술가들과 학자들은 모두 대전에 살고 있었지만, 대전에서 배우며 자란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그 사람들은 내가 대전 출신이란 사실을 모르는 듯했는데, 대화 중간에 심한 모욕감이 밀려왔다. 두 사람의 말이 아직도 또렷하다. 말을 마치고 곧 자리를 뜬 사람의 말. "대전에서 무얼 할 수 있겠습니까? 맛있는 것도 없고, 가볼 곳도 없고..." 어떤 예술가의 말. "지금 이 자리에는 대전 사람이 없는 것 같으니, 솔직히 말할 수 있을 것같다... 대전 사람들과 무슨 예술을 할 수 있겠나...?" 발언 순서가 되어 나는, 일본이 건설한 도시 대전에 대해 말했고, 그 중 한명인 일본의 시인이 `아무것도 할 게 없었던` 땅인 대전의 원주민들과 어떻게 어울렸는지에 대해서도 말했고, 결국 그는 총독부에 의해 추방되고 말았는데, 그럼에도 그는 민주적이었을지언정 식민주의자였다는 말과, 그렇지만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 식민주의자에게 원주민과 어울려 무엇이라도 만들어보려 했던 그 방법이라도 배워야 하리라는 말을 하고 나왔었다. 화가 나서 가방을 놓고 나오는 바람에 그 다음날 찾아들고 나왔던 기억이 있다. 나는 지금도 그들을 예술의 순혈성과 출신의 우월성만을 착각하고 주장했던 프로토 파시스트들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지금도 그들은 대전에서 할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으로 소일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저 무식한 사람들과 할 게 아무것도 없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파시즘의 원형을 몸소 실행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랬던 내가 지금 이곳에서 "대전에 뭐가 있나" 되묻고 있는 것이다. 대전시는 지금 그나마 마련된 충남도청이라는 공간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듯하다. 흔적을 지우고 파괴하고 지난 것을 외면하는 일은 소비적 경쟁을 특징으로 하는 근대도시의 운명일까?

얼마 전부터 해방 이후 대전의 흔적을 살피는 일을 다시 하게 되었다. 그런데 대전의 지형 변화를 한눈에 볼 근대 지도 하나조차 시민들은 편히 찾아볼 수 없다. 대전시공관을 재개관하여 최초로 상연된 악극과 영화가 있을텐데, 대전시는 그 자료 하나 정리해놓지 못하고 있다. 해방공간에서 `대전시 청소의 노래`가 불려졌다는 사실은 둘째치고, 대전 신건설의 정책과 경로가 어땠는지 조차 대전시는 여전히 나몰라라 하고 있다. 그 문화적 흔적들은 둘째치고, 해방 즈음의 지번이 기입된 지도조차 제대로 보급되지 않는데, 어디를 가서 `대전방문의 해`라고 말하라는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에 어떤 건물과 사람들이 오갔는지 알아볼 수 있는 지도가 만들어질 때, 기억 망각의 도시가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지도를 몸소 찾아보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 만명을 능히 당해낼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사람밖에 찾아보지 않기 때문에 필요 없다는 말은 지금 당장의 기능만 쫓는 금권의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일본인들이 조선을 파괴하고 근대도시를 세워 이윤을 거둬가던 그 식민지 지배를 현대에도 고스란히 국적만 바꿔 진행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대전은 자신의 기쁨과 슬픔을 모두 뭉개고 그 폐허에서 역사를 억압하여 건설한 뿌리 없는 도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대전방문의 해에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전국 어디를 가도 쉽게 만날 수 있는, 얼굴 없는 도시인가, 오직 이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역사를 간직한 도시인가. 방문이라는 말만 번듯할 것인가, 실제로 가서 보고 읽고 기억하는 방문이 될 것인가? 대전은 도대체 어떤 도시인가? 그 질문에 답하려면 더 많이 읽고 쓰고 기억해야 한다.

박수연(문학평론가, 충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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