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이 눈 앞인 데 유관순 열사의 `복권`이 이루어지지 않는 건 유감이다. 자유한국당 이명수 의원(아산 갑)이 서훈 승격을 위한 첫 개정안 발의를 했고, 최근 더불어민주당 박완주(천안 을)·한국당 홍문표 의원(홍성·예산) 등이 힘을 내고 있지만 통과는 가물가물하다. 그제 경기도 파주가 지역구인 민주당 윤후덕 의원이 가세한 건 서훈 승격이 충청을 넘어 국민적 공감대가 그만큼 크다는 방증이다. 하지만 2월 국회가 물 건너 간 상황이고 보면 빈손으로 3·1운동 100주년을 맞게 생겼다.

뒷짐을 지고 있는 건 정부라고 다르지 않다. 현행 법에 서훈 변경에 관한 규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국가보훈처 등은 아예 관심 밖이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전례도 있다. 대법원에서 친일행위가 인정된 인촌 김성수의 서훈을 56년 만인 지난해 박탈한 경우다. 허위 공적으로 받은 서훈은 상훈법에 따라 취소를 해야 해 보훈처의 요청에 따라 관련 절차를 밟았다는 게 행정안전부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서훈 이후 새로운 역사적 사실이 속속 밝혀진 유 열사의 등급을 격상하는 게 이치에 맞다.

유 열사가 누구인가. 이화여고 재학 중 16세의 가녀린 몸으로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을 이끌었다. 당시 3000명이 운집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일제의 강제 진압으로 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이 19명이나 된다. 유 열사는 부당한 재판을 거부해 법정 모독죄가 추가되면서 7년 형을 선고받았고, 이듬해 순국한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 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라는 유언에서 유 열사의 참 모습을 본다.

뉴욕타임스(NYT)가 유 열사 순국 98년 만에 실은 부고기사(2018년 3월 29일자)에 그 업적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NYT는 `간과된 여성들` 시리즈에서 "이제 주목할 만한 여성을 추가하려고 한다. 더는 놓치지 않겠다"고 작성 배경을 밝혔다. 이어 "1919년 봄, 한국의 독립을 위한 평화적 시위가 일어났을 때 유관순은 민족의 집단적 자유를 갈망하는 운동의 얼굴이 됐다"고 평가했다. 해외와 달리 정작 우리는 유 열사를 저평가 하고 있으니 낯이 뜨거워진다.

유 열사가 받은 건국훈장이 3등급(독립장)에 머무르고 있는 사이 왜곡은 물론 폄하 현상마저 빚어졌다. 2014년 국사편찬위원회 검정심사를 거친 8종의 고교 한국사 교과서 중 4종이 3·1 운동을 설명하면서 유 열사 관련 내용을 제외시킨 게 대표적이다. "유관순은 친일파가 만들어낸 영웅"이라는 망언도 나왔다. 평가에 인색한 건 NYT의 지적대로 여성이어서인가. 아니면 정치력 약한 충청 출신이기 때문인가. 그도 아니라면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抗日)을 독립운동의 주류로 보는 일각의 기류 탓인가.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행사가 겉돌고 있는 건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는 현실로 볼 때 자업자득이다. 3·1운동에 대한 인식 차이가 극명한 북한과 공동 사업을 추진 한 것 자체가 무리였다. 기념사업회가 내건 `9월 평양공동선언의 철저한 이행`과 `촛불 시민혁명으로 표출된 민의의 제도화`라는 목표도 와 닿지 않는다. 유 열사 재평가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백화점식으로 예고한 기념 사업들을 마주하기가 불편한 건 마찬가지다.

백범 김구가 독립 이후의 세상으로 문화국가를 꿈 꾸었듯 유 열사의 바람도 단순한 해방에 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사적인 100년을 맞아 새로운 100년을 열어가려면 사실 자체를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평가하는 게 우선이다. 우리만 몰랐던 유관순의 진면목을 알아야 새 100년으로 가는 길을 연다. 유 열사 서훈 승격이야말로 그 첫 걸음이다. 베트남전 참전이나 5·18처럼 잘못 알려진 사실은 늦게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 윈스턴 처칠의 경고대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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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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