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가는 길은 늘 새롭고 경이롭고 마음을 설레게 한다. 굽이굽이 산허리를 돌아 재를 넘어 어렵게 다니던 학교길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아무도 모르게 숨어 있다가 한여름 멱 감으러 갈 때 내게만 붉은 앵두를 내어주던 산은 발치로 내려왔고, 그네를 매어 놀던 느티나무는 밑동이 한층 굵어졌다.

참 오래 참았구나 싶다. 고향은 버펄로(아프리카 들소) 같아서 멀찍이 떨어져 있어야 잘 보인다고, 고향은 가슴으로만 그리워하면 되는 거라고 입버릇처럼 중얼거리던 내가 틀렸다.

감꽃을 실에 꿰어 목에 걸고 하나씩 따서 흘려보내며 놀던 냇가, 저녁이면 상고머리를 한 누이들이 나란히 앉아 쌀을 씻고 종아리가 하얘지도록 감자를 까던 우물가, 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려 귀를 열고 피어나던 그 옆 색색의 분꽃송이들, 자정이 되면 색동저고리를 입은 애기씨가 춤을 추며 나온다던 골짜기, 아름답고도 오싹한 마을의 사연들이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다. 언덕을 넘어 막 솟아오르기 시작한 꽉 찬 달과 징이며 북소리, 발아래 사그락거리는 돌멩이들까지 무엇 하나 정겹지 않은 것이 없다.

전주 이가 집성촌에서 지금은 외지 분들이 여럿 함께 어울려 살고 있지만 세속적 의미의 출세한 사람들도 많이 배출됐고 나름 자부심을 갖고 살던 곳이다. 오늘은 정월 대보름, 동구나무를 빙빙 돌며 마을 사람들로 이루어진 풍물단원들의 연주가 처용의 비가처럼 울린다. 청솔가지와 대나무를 쌓아 만들어 놓은 달집 앞 웃는 돼지는 흰 봉투를 받아먹으며 더욱 살이 오른다. 검은 망건을 쓰고 흰 제의를 입은 몇몇 어르신들이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며 재배하고 술을 올린다. 서성이며 부럼을 깨물던 사람들도 두 손 모아 소원을 빈다.

거대한 생명체가 꿈틀거리며 요동을 치듯 유년 시절 난공불락의 장군봉 꼭대기까지 비밀스런 소지(소원을 적은 종이)를 품고 달집 불기둥이 불끈 솟아오른다. 산들이 바짝 다가오고 밤하늘 오리온 별자리가 잠시 빛을 잃고 대열을 흩뜨렸다. 머리에서부터 가슴으로, 발끝으로 스며오는 뜨끈함이다. 여기 내 고향 솔골, 주름 곱고 순한 사람들이 오래 오래 건강하게, 웃음 놓치지 않고 사시기를 소원해 본다. `우리 미숙이 왔구나!` 정다운 말 더 들을 수 있게.

이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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