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친구가 있어 모처럼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내 끝없는 수다를 말 없이 담아주는 깊은 눈을 가진 친구다. 집에 돌아와서도 여운이 남아 가만히 그 눈의 깊이를 가늠해보다가 영화 `영혼의 순례길`을 다시 보기로 한다. 티베트의 작은 마을 망캉에서 여정은 시작된다.

순례는 나보다 먼저 타인을 위한 기도의 길이다. 많은 살생을 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던 백정, 자신의 집을 짓다가 숨진 인부들을 위해 길을 나선 중년의 남자, 출산을 앞둔 임산부, 생전에 꼭 순례를 하고 싶었다던 노인과 몇몇 젊은이들 등 모두 11명이 라싸를 지나 성산 카일라스까지 2500㎞ 먼 거리를 오체투지, 삼보 일배로 간다.

길을 가로지르는 벌레를 만나면 멈춰 기다려준다. 느리지만 답답하지는 않다. 도중에 아이를 낳은 임산부는 몸을 추스른 후 다시 기쁘게 수행길에 오른다. 다른 차 때문에 짐을 싣고 가던 트랙터가 전복돼 순례길이 불투명해졌지만 환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서둘러 보낸다. 노인도 세상을 뜬다. 조카를 포함한 일행들이 스님들에게 수습을 맡기고 스님은 그 서늘해진 몸을 새들과 나누게 했다.

두 시간 내내 성내는 사람이 없었다. 필요한 것이 생기면 마을로 들어가 일을 해주고 직접 얻거나 돈을 좀 받아서 해결한다. 잠시 머무르기 위해 몸이 불편한 집주인 대신 10만 배를 해주기도 했다. 그들의 행위와 언어들이 참으로 경건하다. 행색이 초라하고 세 발자국 옮길 때마다 몸을 던져 바닥이 돼도 정말 행복해 보인다. 부자 같다. 부자란 많이 가진 자가 아니라 필요한 게 적은 사람이라 했으니. 마침내 평생의 소원인 성산 카일라스에 도착했지만 결과보다 그들이 여정에서 보여준 인간으로서의 미덕과 장엄하고 아름다운 자연환경이 잘 어우러진 감동적인 다큐멘터리 영화였다.

예전에는 콩을 심을 때 꼭 세 개를 심었다는데, 하나는 땅 속 벌레를 위한 것, 또 하나는 새와 짐승, 나머지 하나가 바로 사람의 몫이었다는 것. 사람뿐 아니라 벌레나 새나 짐승이 모두 자연의 주인이라 여겼기 때문이 아닐까? 대사 없는 영화의 메시지나 옛사람들의 지혜와 넉넉함을 돌아보매, 물질에 의지하지 않고도 자연과 더불어 서로를 보듬고 충분히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

이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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