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우리가 여간해서 자신과 결부시켜 생각해보지 않지만, 의외로 높은 확률을 가진 상황이 있다. 사는 동안 장애인이 될 확률이 그것이다. 2018년에 보고된 보건복지부의 장애인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인구의 5.39%가 장애인이다.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 20명 중에서 한명은 장애인이다. 미국에서는 장애인 인구를 15%에서 많게는 20%로 보고 있다. 또한 장애 중 후천적 장애가 약 90%인 것을 고려하면, 살다가 어느 날 장애가 될 확률이 그렇게 높다는 것이다. 평생 로또 1등에 당첨될 확률은 지나가다 벼락 맞을 확률보다 낮지만 장애가 될 수 있는 확률은 그와 비교할 수 없게 훨씬 크다.
"아침에는 네 발로 걷고, 낮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로 걷은 동물은 무엇인가?" 썰렁 퀴즈와 같은 이 물음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스핑크스가 오이디푸스에게 한 질문이다. 이에 오이디푸스가 대답한다. "인간이지! 갓난아기 때는 두 손을 쓰며 두 무릎으로 기니 네 발이요, 자라면 서서 다니니 두 발이요, 늙으면 지팡이를 짚고 다니니 세 발이다." 오이디푸스는 정답을 맞혔고, 서글프게도 그 말 속에 인간의 본질이 표현돼 있다. 바로 인간은 근본적으로 나약한 존재란 점이다. 인간은 약하게 태어나고 잠시 건장한 생활을 하는 것 같으나, 다시 약하게 살다 죽게 되는 존재다. 어릴 때 전적으로 타인의 보살핌이 없으면 살지 못하고, 노인이 된 후에는 신체, 언어, 인지능력이 쇠퇴해 어린아이 때와 같이 타인의 보살핌을 받아야 살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인생의 초반부와 후반부를 제외한 중반부에 건장한 경우도 실은 장애인으로 태어나거나 장애가 후천적으로 생기지 않은 운 좋은 경우에 해당한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모든 인간은 동등한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때 그 `인간됨`이라는 것이 개인이 자신의 능력으로 인간됨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것으로 제한되는 것은 아닐까? 독립적으로 보고, 듣고, 의사소통할 수 있고, 감정 통제까지 완벽하게 할 수 있는 사람만을 `정상` 혹은 `비장애`라고 여기는 사회에서 소위 `정상`으로 분류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설령 일생 중 유년기와 청년기에 잠시 `정상`으로 분류된다 해도 그것이 생의 마지막 시점까지 지속될 것이라곤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장애인의 인권과 장애인 복지를 이야기할 때 경계해야 할 입장은 바로 `불쌍한 그들을 도와줘야지`라는 입장이다. 장애인이라고 항상 불쌍하거나 불행하지 않다. 오히려 비장애인이 더 불쌍하거나 불행한 때도 많다. 더 중요한 것은 장애인이 항상 `그들` `남`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앞으로 장애인이 될 수도 있고, 현재의 나 자신도 찬찬히 살펴보면 어디엔가 장애가 있을 수 있다. 사촌이나 가까운 친척까지만 살펴봐도 어느 가정에나 장애인이 한 명씩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장애인 인권은 결국 나의 인권, 나의 미래의 인권, 내 가족의 인권이다. 내가 살다가 좀 다치거나, 나이가 들어 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가 된다고 해도 안전할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하는 진짜 이유다. 장애인 인권을 위한 노력은 결국 나와 관련 없는 `그들의 인권`이 아니라 `내가 마음 놓고 약해질 수 있는 권리`를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다.
전혜인(건양대학교 초등특수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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