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무사히`라는 글귀가 정겨웠던 옛 시내버스 풍경이 기억이 난다. 지금은 운전석에 그런 글귀가 사라진 지 오래지만 세상을 살면서 좋지 않은 일이 주변에서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여전하다.

요즘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숨 가쁘게 달리는 경쟁사회에서 하루를 무사히 보낼 수 있음은 축복이다. 그러나 이런 바램과는 달리 의도치 않게 일이 순탄치 않을 때가 종종 있다. 특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은 그 시련을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해결이 달라질 수도 있다. 철벽같던 인간관계의 난관도 처세에 따라 쉽게 풀릴 수도 있다는 말이다.

영국의 저명한 라이프 스타일 철학자이면서 런던 인생학교를 창립한 교수인 로먼 크르즈나릭(Roman Krznaric)은 우리가 `처세`라고 하는 말의 열쇠를 `공감`에서 찾았다. 그의 저서 `공감하는 능력`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엉킨 실타래를 풀고 상호이해를 증진시킬 수 있는 방법은 타인의 기분과 요구에 집중하여 긴장을 풀면 다툼을 방지할 수 있고, 새로운 대화를 시작할 수도 있으며, 진심으로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더욱이 `적들`과의 공감까지도 마다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적들과의 공감`이라... 위해(危害)한 사람과 어떻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인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 처세술은 당나라의 역사서인 신당서(新唐書)의 내용 중 `타면자건(唾面自乾)`이라는 고사성어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다.

타면자건. 말 그대로 남이 얼굴에 침을 뱉으면 마를 때까지 기다린다는 뜻이다. 공공장소에서 침 뱉는 행위는 경범죄로 벌금을 물게 돼 있다. 그만큼 혐오행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남이 내 얼굴에 침을 뱉었을 때의 모멸감은 오죽하겠는가. 그런데 타면자건에는 상대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참기 힘든 수모도 잘 참아야 한다는 처세의 교훈이 담겨있다.

당나라 측천무후의 신하 가운데 누사덕(婁師德)이란 사람이 있었다. 누사덕은 팔척장신에 사람됨이 신중하고 대범하였으며, 변방 요충지에서 장상으로 30여 년간 많은 공을 세웠다고 한다. 워낙 도량이 넓어 어떤 무례한 일을 당해도 겸손한 태도로 얼굴에 불쾌한 빛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하는데 출세한 아우에게 당부하는 말로써 타면자건의 일화가 유명하다.

출세득명으로 세간의 시샘이 높아지니 아우에게 어찌 처신할 것인가를 물었다. 그러자 아우는 "남이 내 얼굴에 침을 뱉더라도 그냥 닦아내면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답했다. 그에 반해 누사덕은 "아니다. 그 자리에서 침을 닦으면 상대의 기분을 거스르게 된다. 그냥 저절로 마르게 두는 것이 좋다(適逆其意 止使自乾耳)"라고 했다.

누사덕은 적의를 품고 있는 상대의 행위에 즉각적으로 대응하지 말고 인내하기를 가르치고 있다. 즉, 침을 즉시 닦지 않음으로써 적대감을 드러내지 말고, 둘째, 마를 때까지 기다리며 상대가 침을 뱉은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그러면 화를 내고 침을 뱉었던 상대의 마음도 누그러들 것이며 적이라고 생각했던 상대방도 그리 처신했던 나의 속 깊은 마음을 알아 줄 때가 올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는 로먼 크르즈나릭이 "적과 공감해보는 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지만 궁극적으로 큰 보상을 가져다 준다"고 말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최근 언론을 접하는 시민들은 어떤 것이 진실인지 모르는 공방들 때문에 어리둥절하다. 그 논란의 회오리 속에 있는 당사자들이 서로 상처투성이가 되어 가는 모습은 분명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인간관계에서 파생되는 비판과 억측, 왜곡과 모함들은 적대감의 발로다. 시비를 가리기 전에 그 적대감의 원인이 무엇인지 한 번쯤 돌아볼 수 있는 타면자건의 자세를 교훈 삼아보자. 그리하여 우리 사회의 엉킨 실타래를 풀 수 있는 공감과 소통의 자세를 견지한다면 정파 간, 노사 간, 지역 간, 세대 간 갈등들이 보다 온화하게 풀리는 세상으로 변화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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