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도 따지지도 않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 TV를 통해 들어봤을 멘트다. 보험 상품에 대해 시원하게 설명하고 있는 한 원로 탤런트의 대사는 소비자를 현혹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꼭 이 유행어 때문은 아니더라도 앞날이 불안한 요즘 미래를 대비하는 많은 이들은 보험계약서 한 두 개 쯤은 갖고 있다.

그런데 과연 보험사 말대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보험이 있을까. 현실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

"보험금 청구하니까 묻고 따지더라.", "보험금 안주려고 약속한 내용을 모른 체 하더라" 등등. `다양한 핑계로 보험금 지급을 거절한다`는 항의 내용들이 각종 민원 게시판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온라인 게시판 뿐 아니라 변호사 사무실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도 끊이질 않는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들의 상담내용을 보면 큰 교집합이 있다.

가입자의 병력을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보험금 지급을 거절한다거나 병력을 묵살한 보험설계사의 꾐에 보험금을 못 받았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해답은 고지의무에 있다. 상법에서는 가입자가 고지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경우 보험사로부터 계약을 해지당할 수 있고 또 보험사가 보험금도 지급하지 않아도 되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고지의무란 무엇일까. 보험계약 체결 시 보험사에게 중요한 사항을 알려야 하는 의무다. 보험계약체결에 문제가 되거나 보험료 책정에 결정적 요인이 될 수 있는 가입자의 상황을 알려야 하는 것이다. 과거 질병 및 수술여부, 다양한 질환에 대한 복약 등이 대표적인 내용이다.

이와 관련해 눈에 띄는 사례가 있다. 고혈압 증상이 있는 사람이 보험가입 1년 후 백혈병 진단을 받은 경우다. 가입자는 보험계약체결 당시 보험청약서의 고혈압 병력 질문란에 `아니오`라고 기재했고, 보험사는 고지의무위반을 적용해 보험금 지급을 거절한 것이다. 가입자는 이 실수 때문에 한 푼도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

정답은 `아니오`다. 보험사는 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 가입자가 고혈압 증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알리지 않은 것은 고지의무위반에 해당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고혈압 증상으로 인해 백혈병이 발병되었다는 것에는 상식적이지 않다. 고지의무위반과 보험사고(백혈병 진단) 사이에는 납득할 만한 인과관계가 없기 때문에 보험사의 `핑계`는 잘못된 것이다. 때문에 보험사는 보험금을 지급해야 하는 것이다. 다만 보험사는 백혈병 진단에 따른 보험금은 지급해야 하나, 추후 고지의무위반을 이유로 보험계약을 해지해 다른 질병으로 인한 보험금지급책임을 면할 수 있다. 반대로 보험사측 때문에 억울한 일을 겪은 사람도 있다. 보험계약체결 시 가입자가 고혈압 병력을 보험설계사에게 알렸으나 보험설계사가 이를 묵살한 경우다.

가입자는 보험금을 지급받을 수 있을까. 원칙적으로 보험사는 보험금지급을 거절할 수 있다. 보험설계사는 보험가입자를 모집하는 역할만을 할 수 있을 뿐 가입자가 병력을 고지하는 것을 `보험사를 대신해 들을 수는 없다`는 제도 때문이다. 이렇게 가입자로부터 병력 등을 듣는 것을 고지수령권이라고 하는데, 보험설계사에게는 고지수령권이 없다. 결국 가입자는 고지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것이 되고, 보험사는 보험금 지급을 거절할 수 있는 것이다.

가입자는 억울할 것이다. 병력 등에 대해 속인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과연 배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일까. 가입자는 배상을 받기 위해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보험사에게 사용자책임을 묻는 것이다. 보험업법에는 보험설계사가 보험모집과정에서 가입자에게 손해를 입힌 경우 보험사는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또한 가입자가 항상 유리한 것은 아니다. 보험설계사의 행위가 보험계약자의 고지의무이행을 방해하거나 또는 중요한 병력 등에 대해 고지하지 말 것을 권유하는 행위 등이 있을 경우에 한해 배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김한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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