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 초등학교 때 우리들은 이 사회를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좋은지를 배운다. 나쁜 짓을 하면 안된다는 것을 배우고, 질서와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도 배운다. 사실 우리가 사회를 살아가는데 정말로 필요한 것들은 유치원, 초등학교에서 다 배운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제목처럼 그야말로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이다.

유치원, 초등학교에서 강조하는 것 중 하나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나쁜 짓을 하더라도 그 사람을 미워하지 말고 용서하라고 가르친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끝까지 찾아내서 벌을 주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나를 괴롭힌 사람에게 반드시 복수하라`는 것도 말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어린이 동화는 모두 주인공이 다른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하지만 주인공은 모두 다 용서한다. 주인공이 상대방에게 끝가지 복수하고 처벌하는 것은 어린이 소설에서는 나오지 않는 이야기다. 나쁜 사람이 벌을 받는 경우도 많지만, 그것은 주인공이 복수를 해서가 아니다. 주인공은 나쁜 사람이라도 구해주려 하지만 운명이 그를 처벌한다. 우리들은 용서하면서 살아야 한다.

소설 `레 미자레블-장발장 이야기`에서 우리가 좋은 사람,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은촛대를 훔친 장발장을 용서한 미리엘 주교이다. 범죄자를 용서하지 않고 끝까지 추적해서 벌을 주려하는 자베르 경감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베르는 정말 자기 의무에 충실하게 죄인을 뒤쫓았지만, 우리는 자베르를 성실하고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용서를 모르는 잔혹한 인간으로 판단할 뿐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용서를 모르는 사회로 가고 있다.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을 어떻게든 찾아내서 처벌하고 교도소로 보내기를 원하는 사회가 되고 있다. 나쁜 짓을 했는데 구속영장이 발부되지 않으면 구속영장을 발부해주지 않은 판사를 욕한다. 원래 사법 시스템의 기본은 재판이 모두 끝나서 유죄가 확정된 다음에 교도소로 보내는 것이다. 재판이 끝나기 전에 구속해서 구치소로 보내는 것은 편법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범죄자를 모두 구속해서 구치소로 보내기를 원한다. 범죄자에게 구속영장이 발부하지 않은 판사는 나쁜 판사라고 비난을 한다.

과거에 죄를 저지른 사람도 어떻게든 찾아내서 벌을 주기를 바란다. 공소시효는 범죄를 저지른 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처벌하지 않게 하는 제도이다. 하지만 이 공소시효가 비난을 받는다. 나쁜 범죄자들에게는 공소시효를 적용하지 않거나 공소시효를 늘리기를 요구한다. 용서하지 말고 끝까지 처벌하도록 제도를 바꾼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감옥에 들어가면 환호를 한다. 죄를 저지른 사람이 감옥에서 나오면 죄인을 풀어주었다고 비난을 한다. 물론 사법 시스템은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법대로 처벌해야 한다. 그렇지만 안타깝고 안되었지만 어쩔 수 없이 감옥에 보내는 것과 환호를 하면서 감옥에 보내는 것은 다르다. 우리는 지금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이 구속되고 감옥에 가면 정의가 실현되고 좋은 사회가 되는 것처럼 판단하고 환호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유치원, 초등학교 때 배운 것은 용서하라는 것이었다. 기독교, 불교 등 종교에서도 죄인을 용서하라고 하지 처벌하라고 하지 않는다. 처벌은 하나님이 하고 불교의 인과응보 업에 의해서 한다. 이 사회에서는 사법 시스템이 처벌을 한다. 그렇지만 보통 사람들은 용서를 해야 한다. 유치원, 초등학교 때 우리는 그렇게 배워왔고, 또 실제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느 사이, 우리들은 죄인들이 구속되는 것을 바라고 감옥에 보내는 것을 환호하고, 감옥에 평생 가두는 것을 원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유치원, 초등학교 때의 기준으로 보면, 지금 우리들은 절대 좋은 사람들이 아니다. 장발장을 끝까지 쫓아 감옥에 보내려 하는 자베르 같은 사람들이다. 우리들은 죄인 장발장을 용서한 미리엘 주교들이 많이 있는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

최성락 동양미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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