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일보 로고

[알수록 재밌는 문화재] 1909년 조선고적조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2019-01-11기사 편집 2019-01-11 10:22:02

대전일보 > 오피니언 > 사외칼럼

  • 페이스북
  • 구글 플러스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블로그
  • 네이버밴드
  • 폴라로
  • 핀터레스트

첨부사진1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해이기도 하지만 110년 전 국권이 피탈되기도 전인 1909년은 일본인들이 '조선고적조사사업'을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식민지 문화정책을 벌이기 위해 우리 문화재에 대해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시작된 것이 사실이지만, 당시의 고적조사 내용과 실태를 명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우리 역사를 바로 이해하는데 있어 무엇보다 중요하다.

1909년 대한제국의 탁지부 촉탁으로 임명돼 고적조사를 위탁받은 세키노 다다시 일행은 9월 19일 한성에 도착해 21일 조사를 시작으로 12월 27일 부산을 출발해 29일에 도쿄에 도착하는 일정으로 3개월여 기간 동안 이동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조사를 진행했다. 당시 개통되었던 경의선과 경부선 기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주변에 인접한 지역인 경주와 부여 등지를 조사하는 방식으로 조사 여정을 이어갔다.

우리 지역인 충청도에는 11월 26일 조치원에 도착해 27일에는 공주 신원사에서 숙박을 하고 28일 갑사를 거쳐 다시 신원사로 복귀, 29일 은진으로 이동해 다음날인 30일 은진 관촉사 미륵을 조사했다. 30일 논산에서 부여로 이동해 정림사 5층탑과 고란사, 유인원기공비를 조사한 후 12월 1일 공주로 이동, 4일 공주산성을 돌아보고 다시 조치원을 거쳐 대구로 이동한다. 9일간에 걸친 충청지역 조사는 우리 지역에 대한 첫 조사였으나 일제강점기 조선고적조사가 본격화되기 이전으로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1909년 11월 23일 종로 광통관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세키노 다다시가 고려시대 불상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며 "그 중 가장 위대하다고 사람들 입에 회자되는 것은 은진의 미륵석상이지만 나는 아직 조사하지 못하였다"라고 해 그 중요성에 대해 이미 인식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1월 30일 그렇게 기대하던 은진 미륵(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국보 제323호)을 실제 보게 되었을 때 아마도 그 크기에 먼저 놀라지 않았을까? 높이 18.12m에 달하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이 불상은 고려 광종 19년(968년)에 승려 혜명이 제작한 것으로 머리에 원통형의 높은 관을 쓰고 있고 그 위에는 이중의 네모난 모양으로 머리 위를 가리는 덮개가 표현되어 있으며 모서리에는 청동으로 만든 풍경이 달려 있다. 체구에 비해 얼굴이 넓고 큰 편이며 옆으로 긴 눈, 넓은 코, 꽉 다문 입 등 뚜렷한 이목구비가 오히려 못생긴 부처로 명성이 자자하게 만들어 버렸지만 전체적으로 거대하고 과장된 몸의 표현은 오히려 왕의 권위를 투영하여 세운 것으로 당대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다.

당시 세키노 일행의 조사 결과는 유리건판 사진이 남아 있어 일부 확인이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 문화재에 대한 초보적이지만 전반적인 조사가 시작된 1909년의 조선고적조사사업에 관한 자료의 대부분은 아직 일본 각지에 남아 있고 미발굴된 상태이다. 일제강점기 조선고적조사가 비운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지만, 우리가 당시 한반도에서 있었던 우리 문화재에 대한 전국적 조사를 기억하고 되새기며 찾아야하는 이유는 초창기 한반도 고고조사에 대한 객관적인 연구는 물론 올바른 역사 인식을 위한 첫 걸음이기 때문이다.

김혜정 국립문화재연구소 고고연구실 학예연구사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