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 도솔산에 올랐다. 완만하고 순해 사계절 부담 없이 산책하듯 오르는 산이다. 솔잎 위에 쌓인 눈이 가난한 날의 쑥버무리 같아 한 입 뚝 떼어먹고 싶어진다. 조심스레 산길을 오르는데 까치 소리인가, 아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콜록콜록 바튼 기침 소리다. 눈 속에는 앞서 간 몇몇 발자국들이 헝클어져 있었고, 아직 오르지 못한 숱한 발자국들이 그 길을 따를 것이었다.

`미끄러질라, 아가` 막 걸음마를 시작한 손자를 마중하듯 저만치서 한 노인이 계단을 쓸고 있다. 겨울산은 선선히 길을 내어주지 않으니. 어느 산이나 가파른 곳에는 사람들의 안전과 편의를 위해 인위적인 계단이 있게 마련이다. 봄이면 흰 벗꽃잎들이 바람에 흩날리고, 여름이면 일없이 청설모가 끊어놓은 혹은 모진 비바람을 견디지 못한 푸른 잎사귀들이, 그리고 가을에는 예쁜 단풍잎들이 이리저리 쓸려 다닌다. 오늘처럼 일찍 나와 본 적이 없어서였을까? 예전에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왜 도솔산의 나무계단은 늘 말쑥한 모습이었는지, 왜 겨울에도 얼어붙지 않았는지를.

눈을 쓸고 계신 구부정한 노인과 끝이 닳아서 뭉툭해진 빗자루... 감히 앞지르기를 할 수 없어 눈사람처럼 서서 머뭇거리자 노인이 환하게 웃으며 한쪽으로 비켜주신다. 정상을 코앞에 남겨두고 마시려던 재스민차를 조금 나누어 드렸다. 1년 시한을 남긴 환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예전에도 같은 일을 하던 분이 계셨고 요즘은 안보이더라고 걱정이시다. 따뜻한 집안에서 편히 쉬고 싶지 않느냐고 여쭙자 마음 다스리기에도 좋고 오히려 더 행복해진다며 힘 남아있을 때까지 계속하시겠단다. 그러니까 내가 늘 오르는 이 계단이 저 분에게는 천국으로 가는 문턱이 될 수 있겠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가끔씩 등 뒤로 메아리쳐 돌아오는 노인의 기침소리에 나무 끝 눈송이들이 놀라 떨어진다. 모쪼록 이 분이 건강한 모습으로 더 오래 계셔주시기를 마음속으로 빌며 내려오는 길에 걸리적거리는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서 멀리 던졌다.

오늘은 내 집에 어떤 언어를 들여놓을까, 어슷어슷하던 내 생각의 문이 비로소 환히 열리고, 또 한 편으로는 쇠구두를 신은 것처럼 무거워지는, 겨울 아침이다.

이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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