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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이야기] 만월대와 창덕궁

2019-01-03기사 편집 2019-01-03 08:4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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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송악산 밑 산비탈에 흔히 '만월대'라고 불리는 고려 궁궐터가 있다. 고려 태조 2년(919) 창건된 후 공민왕 10년(1361) 홍건적의 침입으로 불타 폐허가 될 때까지 고려 궁궐이 있던 자리다. 2007년부터 남북이 공동으로 고려 궁궐의 모습을 밝히기 위해 만월대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을 해오고 있으니 벌써 10년이 넘었다. 2015년 남북관계가 경색되어 남북공동발굴이 중단되었다가 작년 '한반도의 봄' 기운을 타고 다시 재개되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작년 11월 초부터 12월 중순까지 고고학, 고건축, 미술사 전문가를 파견해 만월대 남북공동발굴을 주도했으며 올해도 날씨가 풀리는 데로 발굴을 재개할 예정이다.

나는 2007년 남북공동발굴 협의를 위해 처음 만월대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송악산 아래 펼쳐진 만월대의 형상을 보고 '아!' 하고 감탄사를 터트린 기억이 난다. 서울에 있는 창덕궁의 원형을 발견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2005년 1월부터 2006년 12월까지 창덕궁에서 근무하는 행운을 누렸는데 경복궁과 너무 다른 창덕궁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늘 궁금하던 터였다.

1392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1394년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이듬해 조선의 법궁(法宮: 으뜸 궁궐)으로 경복궁을 세웠다. 불교 왕조 고려를 멸망시키고 유교를 국시로 내건 조선이었기에 경복궁은 중국의 궁궐 제도를 모범으로 했다. 북악을 등진 평지에 궁궐터를 잡고 남북을 가로지르는 축을 두고 그 위에 궁궐의 주요 문과 전각을 배치했다. 남에서 북으로 차례로 궁궐의 정문인 광화문, 둘째 문인 흥례문, 세째 문인 근정문, 정전인 근정전, 편전인 사정전, 침전인 강령전, 왕비의 처소인 교태전을 나란하게 세웠다. 조선의 건국 이데올로기를 주도했던 정도전이 주동이 되어 유교 예법에 따라 궁궐의 설계는 물론 각 전각과 문의 이름까지 지었다.

이에 비해 창덕궁은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 일파를 몰아내고 실권을 잡은 3대 임금인 태종이 1405년 개경에서 한양으로 다시 서울을 옮기면서 세운 궁궐이다. 창덕궁은 북악의 동생 격인 응봉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린 산자락에 지어진 '산중궁궐'이다. 경복궁이 평지에 남북을 가로지르는 축을 두고 반듯하게 세워진 '모범생'이라면 창덕궁은 산세에 맞추어 자유롭게 앉혀진 '개성파'라고 할 수 있다.

조선에서 공식적으로 법궁은 경복궁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창덕궁이 주로 사용되었다. 태종은 아예 경복궁에 가질 않았고 다른 임금들도 경복궁보다는 창덕궁을 선호했다. 정형화된 경복궁이 위엄을 갖춘 관복과 같다면 산림이 우거지고 곳곳에 계곡물이 흐르는 창덕궁은 편안한 일상복과 같아 살기 편했기 때문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서울의 모든 궁궐이 불탄 후 광해군 때 궁궐을 복구할 때 경복궁은 버려두고 창덕궁을 택했는데 아마 정서적인 면이 작용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전 국토의 70% 이상이 산으로 되어 있어 조상 대대로 산과 인연을 맺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산자락에 집을 짓고 생활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경복궁은 평지인 데다 정형화된 긴장감이 있어 산에서 사는데 익숙한 유전인자를 가졌던 조선 사람들에게 편치 않았을 것이다.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지만 태종이 한양으로 수도를 다시 옮기면서 경복궁을 두고 창덕궁을 세웠을 때 개경에 있었던 고려 궁궐터 만월대를 염두에 두었을 법하다.

만월대가 발굴되면서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고려 궁궐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아직 조금 밖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이것만으로도 산비탈에 궁궐을 지은 우리의 '토종 궁궐' 창덕궁의 원조라는 것이 보인다.

최종덕 국립문화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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