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신문 선정 올해의 사자성어는 `임중도원`(任重道遠)이다. `논어` 중 `태백편`에 나오는 말로 짐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는 뜻이다. 한반도 비핵화 실현과 경제를 비롯한 국내 정책에 난제가 수두룩한 현실을 투영한다. 내년이면 집권 3년차를 맞는 문재인 정부가 여러 현안을 차질없이 추진해야 한다는 주문을 담고 있기도 하다. 2위에 오른 `밀운목우`(密雲不雨·구름만 가득 끼어 있고 비는 내리지 않는다)라고 달리 읽히지 않는다.

지도자만이 역사를 만드는 건 아니다. 때로 세상은 소시민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간다. 윤창호와 김용균이라는 이름을 다시 한번 선명하게 떠올리게 되는 세밑이다. 둘 다 20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황망하고 어이없는 죽음을 뒤로한 채 안전 의식을 일깨우고, 기득권을 부수는 논의의 불을 당겼다. 2018년은 이들을 보다 나은 나라로 가는 징검다리가 된 인물로 기억할 것이다.

먼저 윤창호씨. 군 복무 중이던 그는 지난 9월 면허취소 수치인 혈중알콜농도 0.181% 상태의 만취운전자 BMW차량에 치어 숨졌다. 검사와 대통령을 꿈꾸던 젊은이였다. 친구의 정의로운 삶을 잘 아는 동창생들이 중심이 됐고, 누리꾼이 20만 명 넘게 청와대에 청원 글을 올리는 관심과 연대의 힘을 보탰다. 참여는 변화를 만들어내는 동력이다. 음주운전 사망사고의 경우 최대 무기징역으로 처벌하는 내용의 법률, 이른바 윤창호법이 탄생한 배경이다. 국립대전현충원의 윤씨는 이제 영면에 들었을까.

지난 11일 충남 태안화력발전소 석탄이송 컨베이어벨트 점검 작업 중 몸이 끼여 숨진 하청 노동자 김용균씨도 있다. 그는 24세 청년으로 입사 3개월 만에 단 사흘간의 `교육`을 받고 현장에 투입된 협력업체 소속 비정규직이었다. 뚜껑을 연 뒤 머리를 집어넣어 벨트를 확인하는 CCTV 속 영상은 열악하기 그지 없는 작업 환경을 생생히 보여준다. 유품은 끼니를 떼우기 위한 컵 라면 몇 개와 석탄에 찌든 작업복 뿐. `죽음의 외주화`가 부른 사회적 타살이라 해도 입을 열지 못하게 한다.

사측의 대응은 안이하기 짝이 없었다. 사건이 터지자 직원들의 입 단속을 하는 데 급급했고, 축소를 시도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대책회의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니 신속한 진상 규명이나 사과, 재발 방지 같은 게 눈에 들어왔을 리 만무하다. 급기야 "내가 김용균이다. 비정규직 철폐하라"고 외치며 청와대를 향해 항의 시위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앞서 윤창호법 공동 발의자로 이름을 올린 한 국회의원이 음주운전에 걸린 코메디를 연출한 상황이고 보면 지도층과 국민 사이의 간극이 이토록 클 수 있다는 게 웃프다.

김씨의 비극은 현재진행형이다. "우리 아들들 또 죽어요", "애들 살리고 싶어요"라며 연일 국회에서 호소에 나선 어머니 김미숙씨 모습이 절절하다. 산업안전보건법 전부 개정안을 조속히 처리해 다시는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해달라는 요청이다. 국회가 오늘 외주화 방지 등을 골자로 한 법안을 본회의에 상정할 지 지켜볼 일이다. 사고가 날 때마다 "절대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겠다"던 정부와 정치권의 방임과 직무유기가 도를 넘었다.

소리만 요란했지 먹구름 짙은 첩첩산중에서 꼼짝 달싹 못한 1년이었다. 외교·안보·경제 어느 것 하나 시원하게 풀리지 않은 반면 엉뚱한 죽음이 너무 많았다. 노동자와 학생, 성매매여성처럼 하나 같이 사회적 약자였다. 지난해 이 즈음 발생한 제천화재 참사 교훈은 벌써 남의 나라 일이 돼버린 인상이다. 국민 안전을 지켜야 마땅한 국가가 기본 책무마저 소홀히 했다는 얘기다. 그나마 윤씨와 김씨의 희생으로 변화의 물꼬를 튼 걸 위안으로 삼아야 할까. 연말연시 서설이라도 펑펑 내려 두 젊은이를 위무하고, 국민 마음을 씻어 주기를. 내년에는 보다 온기가 도는 세상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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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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