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살면서 한글시를 쓰는 시인들이 적지 않다. 그들이 한글시를 창작해 온 이력은 미국 이민의 역사와 온전히 일치한다. 미국 이민의 역사는 20세기 초반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에 노동자들을 파견한 것에서 출발했다. 놀랍게도 한인들은 이때부터 한글시를 쓰기 시작했다. 1905년에 이민선을 타고 하와이에 정착한 이홍기는 1905년에 `이민선 타던 전날`이라는 시를 발표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창간한 교민 신문인 `공립신보`에 실린 이 작품은 미국에서 창작된 최초의 한인시였다.

`이민선 타전 전날` 이후 미국에서는 고전시가와 근대시의 과도기적 형태인 창가가 다수 발표됐다. 191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국내와 마찬가지로 근대시의 형태인 자유시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내용도 국내와 다르지 않게 애국이나 계몽, 독립과 같은 당대의 민족적 현안과 관련된 것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다만 1920년대 이후 광복 이전까지 자유시가 주류를 이루던 국내의 사정과는 다르게 아직 창가 형태의 시가들이 많았다.

미국의 한인시가 하나의 지역 문학 단위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광복 이후이다. 특히 1960년대와 70년대 이후 노동자 이민보다는 지식인 혹은 전문가 집단의 이민이 증가하면서 시단도 활성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 시기에는 국내에서 등단을 하고 미국에 이민을 간 시인들이 많은 활동을 전개했다. 시의 내용도 고달픈 이민 생활, 디아스포라 의식, 아메리칸 드림 등이 다양하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모국의 정치적 불안과 독재 체제에 대한 비판적 인식도 적극적으로 드러난다.

미국 한인시는 198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다변화와 전문화의 과정으로 나아간다. 이 시기에 미주문인협회, 미주시인협회, 크리스찬문학회 등의 문학 단체가 탄생하면서 본격적인 시단이 형성됐다. 이 단체들이 `미주문학`, `외지(外地)`, `크리스찬문학`, `문학세계` 등과 같은 문예지(동인지)를 발간하면서 미국의 한인시는 한층 활성화되었다. 미국에서 발간되는 `한국일보`와 `중일일보`가 신춘문예 제도를 시행하여 새로운 시인들 발굴하기 시작했다는 점도 기억할 만하다. 이 시기는 미국 한인시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였다.

미국의 한인시가 확장성을 띠고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부터이다. 이 시기는 1980년대에 활성화되었던 문학단체 활동이나 문예지 발간이 더욱 다양하게 발전적으로 이어졌다. 새로 창간된 문예지 `뉴욕문학`은 그러한 변화를 선도했고, 사화집 `2000년 시의 축제`(1999년 발간)는 미주 시문학의 세계화와 국제적 위상을 점검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시의 내용은 여전히 디아스포라 의식을 기반으로 삼고 있지만, 한인 공동체 의식을 넘어서 미국이라는 국가 공동체 의식으로까지 나아가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이 시기 미국 한인시단은 각종 문예지나 신춘문예를 통해 자체적으로 신인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L.A와 뉴욕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시단이 워싱턴이나 시카코, 샌프란시스코, 애틀란타 등으로까지 확장되었다. 또한 한때 미국 내 한인 사회를 혼란에 빠뜨렸던 `L.A폭동`은 1990년대 미국 한인시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이 사건은 한인의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거나 미국 사회에의 적극적인 동화를 지향하는 내용이 담기는 계기가 되었다.

21세기 들어선 이후 최근까지도 미국의 한인시인들은 한글시의 활성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낯선 이국땅에서 겪은 우여곡절을 노래하는 그들의 시는 일찍이 국내의 시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이성을 간직하고 있다. 그들은 바쁜 생활의 시간을 쪼개고 얇은 주머니를 털어서 시집을 내고, 동인지와 문예지를 꾸준히 발간하고 있다. 그들은 김수영 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문학을 위해 헌신하는 `순교자들`이다. 지난 여름, L.A에서 있었던 재미시인협회 문학축제의 특강을 하면서 만났던 그 순교자들의 얼굴을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들의 시는 한국문학사의 소중한 자산으로 기록되어야 한다.

이형권(충남대 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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