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내신 신뢰도 제고 핵심은 '교사 평가 무게중심'

우리나라는 10월만 되면 걸리는 병이 있다. 이웃나라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면 증상은 더 심해진다. `노벨상 병`이다. 이 병의 치료를 위해 전문가들은 다양한 진단과 해법을 내놓는다. 결론은 늘 창의적인 인재 육성과 기초과학 투자로 귀결된다. 한 사람의 교육자로서 창의적인 인재 육성에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노라고 변명을 해왔다. 이제 변명은 그만 두려고 한다.

학교에서 학생평가는 지필평가와 수행평가로 이뤄진다. 지필평가에서는 지식을 암기해 문제에 잘 적용하는 학생이 높은 점수를 받는다. 과학과목 수행평가는 과학적 태도, 탐구 능력, 창의력 등 미래 사회에서 요구하는 핵심역량들을 평가한다. 수행평가 덕분에 외부에서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해도 교육계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수행평가가 얼마나 부실한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수행평가는 학생 간 차이가 거의 없다. 왜 그럴까? 창의성이나 협업 능력 등을 정량적으로 평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성적인 평가에서 점수 차이가 나면 학생과 학부모의 반발이 어떻겠는가? 이를 잘 아는 교사는 과제를 늦게 제출하거나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등 형식적 근거가 뚜렷한 경우에만 점수를 깎는다. 질적인 평가는 엄두도 못 낸다. 학생들이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수행평가는 거의 다 만점을 받을 수 있는 이유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수행평가를 통한 핵심역량의 향상은 기대하기 어렵다. 초등학교 때부터 과학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탐구하지 못하며 영어 문제는 풀어도 영어로 의사소통하지 못하는 이유다. 진짜 핵심역량을 키우기 위해 노력한 학생들이 평가에서 그만큼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반면에 지필평가는 난이도 조절을 통해 쉽게 학생 간 점수 차이를 만들 수 있다. 모두가 공평하다고 믿기 때문에 교사는 지필평가로 줄을 세운다. 성적이 지필평가에 의해 좌우되는 상황에서 어떤 학생이 문제풀이에 집중하지 않겠는가? 현명한 학생들과 사교육 시장은 이런 평가 시스템에 발 맞췄을 뿐이다. 교사가 수행평가를 무력화시키고 문제풀이에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필자도 22년을 그런 교사로 살아왔다.

지난해 1학기 작은 시도가 필자의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지필평가가 아닌 수행평가로 성적이 좌우되도록 평가시스템을 바꿨다. 곧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학생들이 창의적 사고 역량을 향상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수업시간 후에도 자발적으로 모여 서로 토론하고 협력했다. 수행평가 기준이 창의적 사고, 의사소통, 공동체 역량이었기 때문이다. 수행평가 점수 차이에 의해 성적이 좌우되도록 만들었더니 순식간에 학생들이 바뀌었다. 학생문제도, 입시제도 문제도 아니었다.

역시 가장 힘들었던 점은 평가였다. 선생님의 사고 패턴에 맞춰야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느냐는 말까지 들었다. 논문들을 참고해 구체적인 평가 기준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법도 해석하기 나름이듯 평가기준도 그러해 학생들의 항의는 끝이 없었다. 하지만 해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여러 선생님들이 공동으로 평가하자 믿을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다. 아무도 항의하지 않은 것이다.

만약 우리나라 모든 학생의 성적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필요한 핵심역량들에 의해 좌우된다면 학생들은 어떻게 달라질까? 사교육 시장은 어떻게 변하겠는가? 부모님들은? 교사가 평가의 무게중심만 바꿔도 학생, 학부모, 사교육 시장 등이 한꺼번에 바뀔 수 있다. 온 사회가 미래 사회에서 요구하는 핵심역량을 향상시키기 위해 한마음 한 뜻이 돼 움직이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예전에는 몰랐다. 내 손에 열쇠를 쥐고도 국가, 학생, 학부모가 문제를 해결해 주기만을 바라고 있었다는 사실을. 미래 사회가 요구하는 능력들을 평가하고 성적에 반영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교사`뿐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지금까지 필자는 어떻게 하면 학생들을 잘 가르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이제는 어떻게 하면 잘 평가할 수 있을까를 고민할 때가 됐다. 4차 산업혁명 시대. 더 이상 남 탓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김종헌 대전과학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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