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어디에나 있어서 우주만물이 각각의 길을 간다. 미생물도 동물도 너도 나도 가고 간다. 하지만 어느 길을 찾아 가느냐가 문제다. 사람으로 좁혀 말하면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 그것은 삶의 길이고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생활방식이다. 제 길을 잘 따르면 평안하지만, 벗어나면 불안하다. 갈등과 전쟁을 유발한다. 요즘 세상은 땅뺏기 전쟁이 아니다. 경제·종교·사상 등 종류도 다양하다. 모두가 각각의 길이 다르기에 이를 잘 닦아야 한다. 길은 추상적 의미가 더해져 도(道)라 하기에 이른다. 도란 무엇인가? 길의 질서를 이성적으로 정리하는 것이다.

유도(儒道)는 신독(愼獨)이 근본이다. 중용에서는 "하늘에서 명한 것을 성이라 하고, 성을 잘 지키는 것을 도라 하고, 도를 닦는 것을 교라 한다(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맑고 깨끗한 천성을 지키는 도를 항상 가까이서 잘 닦아야 하기 때문에 "도라는 것은 잠시라도 떠나서는 안 되니 떠난다면 도가 아니다(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非道也)"라고 한 것이다.

어디를 떠난다는 말인가? 신독이 나를 떠난다는 것이다. 곧 내 자신이 홀로 어디에 있든 부끄러움 없이 항상 삼가함(愼其獨)이 나를 떠나는 것이다. 남들이 보지 않아도 경계하고 삼가며 듣지 않아도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어야 하기에 도불원인(道不遠人)이다.

도가(道家)의 도는 자연(自然)에서 찾았다. 자연은 무위(無爲)하면서 동시에 유위(有爲)한다. 그래서 노자는 "도를 도라 하면 도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라고 말했다. 자연의 무위청정(無爲淸淨)한 삶을 영위함으로써 도에 귀일(歸一)할 수 있고, 그렇게 될 때 천지와 더불어 장생(長生)할 수 있게 된다고 보았다.

불도(佛道)의 경우는 진리 자체를 도로 보았다. 즉 인연에 따라 끊이지 않고 윤전(輪轉)하는 도, 밟고 다니는 길이란 뜻으로 궤로(軌路)의 도, 통입(通入)의 뜻으로 결과에 도달하는 통로의 도이다. 탄허(呑虛) 대종사는 `분별심(分別心)이 끊어진 자리`를 도라 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각각이 다른 면을 강조하는 것 같지만 공통점은 인간의 인간다움을 도에서 찾으려고 한 것이다. 따라서 동양문화의 바탕은 이 도를 시작과 끝으로 삼았고, 인위적인 기교보다는 자연 섭리에 따르는 무위자연적(無爲自然的)인 삶을 갈망하였으며, 그와 같은 삶의 여로를 통한 진리 증득(證得)이 값진 일이라 천명한다.

그렇다면 서예에도 도가 있는가? 있다. 이의 본체(本體)는 자연의 도이다. 글씨는 처음에 인성교육의 일환으로 시작되었지만 예술적인 측면으로 발전하면서 자연스럽게 도와 더욱 가깝게 되었다. 동진(東晋)의 왕희지(王羲之)는 "서(書)의 기(氣)는 반드시 도에 이르러야 하는 바 혼돈(混沌)의 이(理)와 같다"하였고, 채옹(蔡邕)은 "서는 자연에서 비롯되었다. 자연이 이루어지니 음양(陰陽)이 생기고 음양이 생기니 형과 세가 나오게 되었다" 하였다. 당(唐)나라 장회관(張懷瓘)은 "서는 마치 명밀(冥密)한 곳에 귀신이 있는 것처럼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그의 현묘한 관문을 열고 그의 지극한 이치를 터득함이 곧 대도(大道)와 다름없다" 하였다. 이는 곧 서예의 과정을 서정(抒情)의 과정으로 보아 그 심오한 이치는 우주의 도와 통하여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높은 경지의 서품은 유위성 보다 무위성을 중시한다. 이는 법에 따라 수련하지만 법을 알았으면 이를 초월하여 독특한 추상성을 강조 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고 초법(超法)이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자연법에 의한 나름의 고집(固執)이어야지 아집(我執)을 앞세워서는 안 된다. 서예는 자연의 원리를 근본으로 한 자유로운 영혼의 표현이다. 작가 스스로 도를 확립하는 것이지 도가 작가의 도를 넓혀주는 것은 아니다.

송종관 서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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