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汝)라는 강변에 대대로 무식하지만 재산은 많은 영감이 살고 있었다. 언젠가 초나라 선생님을 모셔서 아들에게 글을 가르치는데, 선생님은 붓을 쥐고 획을 긋는 법부터 가르치기 시작했다. 한 획을 긋고 한 일이라 하고, 획을 더해가며, 두 이, 석 삼이라고 가르쳤다. 그러자 아들은 붓을 내던지고 더 이상 배울 게 없다며 아버지에게 선생님을 돌려보내라고 말한다. 아들의 총명함을 대견하게 여긴 영감은 친구 만(萬)씨를 초청해 잔치를 벌이기 위해 아들에게 초청장을 쓰라고 한다. 한참이 지나도 아들은 답이 없어서 재촉하고자 들여다보니, 아들은 아침부터 긋기 시작한 줄 긋기가 아직 오백 획밖에 안 되었다면서 왜 세상에 수많은 성씨 중에 하필이면 만씨냐면서 몹시 짜증을 냈던 것이다. 이런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영감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명나라의 유원경이 쓴 『현혁편』에 나오는 <만자만획(萬字萬劃)>이라는 이야기이다.

며칠 전 끝난 대학수학능력시험의 후폭풍이 뜨겁다. 항상 수능이 끝날 때마다 다양한 의견과 문제점들이 쏟아지긴 하지만 올해는 유독 심한 후유증을 겪는 모양새다. 수험생과 학부모들은 문제 하나하나에 발을 동동거린다. 득점에 따라 사회적 우열이 나눠지고, 오직 그것만을 목표로 이십 년을 달려왔기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안다. 이러한 맹목적 경쟁은 과거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19세기에 다산 정약용은 천하의 총명하고 지혜로운 인재들을 모아 한결같이 모두 `과거(科擧)`라는 절구통에 넣고는 마구 빻고 때려서 문드러지는 현실을 개탄하기도 했다. 천하의 인재들이 오직 과거에만 매달리는 조선의 현실이나, 오늘의 수능이 크게 다르지 않다. 다산의 고민이 마치 오래된 전통처럼 21세기인 지금까지 유효한 것이다.

현대 사회는 지식 경쟁 사회로 치닫고 있다. 오직 지식의 총량으로만 인재의 기준을 결정하고 있는 것이다. 지식 습득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은 하지만, 이것을 경쟁이라는 프레임에 집어넣고는 조장하는 분위기가 문제인 것이다. 경쟁하려면 비교하게 되고, 비교가 되면 우열이 나눠지니, 사회는 당연히 수직적 서열구조로 줄이 세워진다. 경쟁이 마냥 나쁜 것은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승패가 결정되면서 `위너`와 대척점을 이루는 `루저`들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회적으로 낙인이 찍히게 되는 것이 문제이다. `언행과 외모가 볼품없고, 능력과 재력이 부족해서 대접을 못받는 사람` 운운하는 루저의 사전적 의미도 마뜩잖다. 많은 부분들이 위너에게만 초점이 맞춰진 승자 독식의 사회인 것이다.

현대사회는 `잘하는 사람보다 열심히 하는 사람`, `지식보다는 지혜로운 사람`, `이성적인 판단보다 인성이 좋은 사람`을 필요로 해야 한다. 노력, 지혜, 인성의 삼종 세트를 갖춘 `노지인(努智人)`이 인정받는 세상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열심히 노력했어도 루저가 될 수는 있겠지만, 루저라도 얼마든지 지혜롭고 인성이 좋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식의 총량이 지혜의 깊이나 인성의 본바탕까지 높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만 개의 획만 그어대는 아들처럼 자신의 얄팍한 지식을 믿고 스스로 머리 좋다고 착각하는 헛똑똑이(?)들의 우(愚)를 경계해야만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아는 완전한 지식은 없다. 모자람이 있기에 공자의 말씀처럼 항상 때때로[時] 배우고[學] 익히는[習] 것이다. 배움은 지식을 채우는 종결의 의미가 아니라, 또 다른 연결의 시작을 의미한다. 배우면 배울수록 모르는 것이 많아진다는 역설적인 의미도 이와 같다. 단지 경계해야 할 가장 큰 병폐는 배움에 자만하지 말아야 한다. 자만의 쳇바퀴에 빠지면 오만, 거만, 교만을 동시에 불러와서 영원히 획만 긋는 어리석음을 범할 것이기 때문이다.

김하윤(배재대 주시경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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