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 모든 것이 놀잇감이다

프뢰벨이 살았던 18세기말이나 19세기 초만 하더라도 아이들이 놀이를 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그의 생각은 그게 아니었다.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을 간파하고, 아이들이 뛰어노는 푸르른 정원(kindergarten)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아이들은 정원에서 마음껏 뛰어놀면서 자연 속에 있는 진흙과 조약돌, 시냇물과 이슬방울, 풀과 나무, 나비와 메뚜기와 개구리와 벌레들과 바람과 햇빛과 그림자와 뛰고 놀면서, 몸과 마음이 튼튼하게 자라나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이 `kindergarten`이라는 말은 오늘날 독일어, 영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스웨덴어 등에서 유치원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유치원이라는 말은 애초에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면서 자라는 곳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 놀이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를 실행에 옮겼던 프뢰벨 이후, 유럽에서는 지금도 숲속유치원이라는 전통이 내려오고 있다. 몇 년 전 우리나라 방송에서 특집으로 다뤘을 정도로 유명한 이 유치원들에서는, 잘 정돈된 교실 대신, 진흙바닥에 뒹굴고, 시냇물 가에서 이끼 낀 나무껍질과 조약돌을 가지고 놀면서, 그때그때 자신이 경험하는 것을 통하여 자연을 배우고, 또래와 어울리면서 사회규범을 익히고, 선생님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보면서 자라나는 형태로 운영된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놀면서 세계를 이해한다. 더 정확하게는 대상과의 접촉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돌 이전의 아이들을 관찰해 보면, 이 시기의 아이들은 자신의 발가락이나 주먹, 담요나 의복이나 젖병 등을 놀잇감으로 사용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조금 더 자라서 아이가 기거나 걷기 시작하면 주변에 있는 온통 모든 물건이 장난감이 된다. 엄마의 화장품이나 아빠의 지갑은 물론이고, 정돈된 책상서랍이나 양말바구니도 자신의 놀잇감으로 사용하게 된다. 아이들의 세계에서 놀잇감이 아닌 것은 없다. 자신의 생활이 온전하게 놀이로 이루어져 있고, 이 때 소용되는 놀잇감에도 따로 제한이 없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자신이 가지고 놀 수 있는 것들이다. 아이들에게 그것이 할아버지의 등허리거나 할머니의 가녀린 팔이라고 하더라도 놀잇감이 아닐 필요가 없는 것이다.

놀잇감을 통해 아이들은 주변의 세계를 파악하고, 존재들의 특성을 이해한다. 자신의 놀잇감이 아닌 것이 무엇인지를 구별하기 시작하면서 세계의 질서에 대해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아이들의 놀잇감을 통해 아이들의 세계에 동참해야 한다. 어머니이거나 선생님이거나 어린아이들을 양육하는 사람들이라면 아이들의 놀잇감에 유난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놀잇감으로 아이들과 대화하고, 놀잇감을 통해 규칙과 예절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아이가 숲속 유치원에 다니지 못한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 우리 평범한 거실에서 아이들이 가지고 놀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조금 더 세심하게 신경을 써주면 된다. 아이들에게 더 많은 시간 놀게 해주고 더 많은 놀잇감과 접촉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어른의 눈으로 판단한 놀잇감이 아니라 아이들의 호기심으로 놀잇감을 선택하도록 허용되어야 한다.

숲속 유치원의 교훈은 어른들의 눈으로 아이들의 세계를 정돈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서 아이들이 자신의 호기심과 역량으로 세상을 정돈해가게 허락하는 것이다. 우리 평범한 유치원이나 학교나 가정에서도 이정도의 철학은 실현할 수 있지 않겠는가?

윤국진(대전서원초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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