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독립운동 유적지를 가다 ⑫ 뜨거운 항일의 고장 영동

1991년 세워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에 위치한 `7지사 독립운동 기념비`.
1991년 세워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에 위치한 `7지사 독립운동 기념비`.
영동은 옛부터 교통의 요지였다. 남쪽 지역에서 한양을 갈 때 으레 들르는 곳이었다. 항일의 의지가 전국으로 확산되는 길목이기도 했다. 일제의 수탈 역시 노골적으로 진행돼 3·1만세운동도 당시 전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만큼 거세게 일어났다. 이제 100년의 세월이 흘러 그 뜨거웠던 의지를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독립군을 지켜준 느티나무는 항일 운동의 상징으로 든든히 우리를 지키고 서 있다.

△3·1 만세운동 수호신 `독립군 나무`

충북 영동군 학산면 박계리 마을 입구에는 `독립군 나무` 로 불리는 느티나무(사진)가 있다. 수령 350여 년으로 추정되는 이 나무는 둘레 10m, 높이 20m로 거대하다.

영동군이 보호수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는 이 나무는 원래 따로 떨어진 두 그루의 나무였지만 밑동이 맞붙어 자라면서 얼핏 보면 한 그루로 보인다. 이 나무가 남다른 이름이 붙여진 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 경찰의 감시망을 피해 독립투사들의 안전을 지켜줬다고 해서 독립군 나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 느티나무가 서있는 길목은 오래전 한양과 전라도를 이어주는 지름길이었다. 동쪽으로는 경북 김천, 서쪽으로는 충남 금산, 남쪽으로는 전북 무주, 북쪽으로는 한양을 갈 수 있는 요충지였다.

이 마을에는 국가의 공문서를 전달하고 관리의 운수를 돕는 역참(驛站)과 숙소 역할을 했던 원(院)이 있었고 관리인도 20명이 살았다. 남부지역에서 한양으로 이동하는 독립투사들 역시 이 마을을 지났는데 이를 간파한 일본 경찰이 잠복근무를 하며 검거를 했다.

마을 사람들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알리기 위해 독립군 나무를 사용했다. 나뭇가지에 흰 헝겊을 달면 `왜경(倭警)이 없음`, 흰 헝겊이 달리지 않으면 `왜경이 있으니 조심하시오`란 신호였다. 숲속에 숨어있던 독립군들이 느티나무에 걸린 헝겊을 보고 안전하게 길을 지나갔다.

일본 경찰의 감시망을 피해 전국 규모의 독립운동을 전개하는데 독립군나무가 큰 역할을 한 것이다.

3·1 운동 때에는 서울에서 남부지방으로 독립선언문을 전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일제가 물러간 뒤 마을 주민들은 이 나무를 `독립군나무`또는 `독립투사 느티나무`로 부르고 있다.

영동군은 1982년 11월 이 느티나무를 군 보호수(제43호)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군은 올해 초 지역의 상징물로 보존가치를 높이고 관광객 및 주민 쉼터의 역할을 하도록 사업비 2000여만 원을 들여 보호수와 주변을 새롭게 단장했다.

토양을 치환해 나무의 생육 환경을 개선하고 노후 돼 파손된 둘레석을 정비해 자연친화적 휴식공간을 마련했다.

현재 이 느티나무는 그 시대의 장엄함과 위풍을 그대로 간직한 채 마을을 든든히 지키고 있다. 나라수호 역할과 그 고귀한 독립정신이 깃들어 있어 많은 이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영동군 관계자는 "독립군 나무는 조국 독립을 위해 희생한 독립투사와 마을 주민의 애국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나무"라며 "조국 광복의 감동을 전하고 주민의 쉼터 사랑방 역할을 하도록 관리에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영동의 3·1 운동은 타 지방보다도 가장 격렬하게 전개.

1919년 3월 1일 광무황제 인산(고종의 장례식)을 계기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제의 무단통치에 항거하는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전국적으로 확산된 3·1 운동은 좀 늦었지만 충북지방에서도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영동지역에서도 다른 지역의 어느 지방보다 격렬하게 전개됐다.

영동의 3·1 운동은 다른 지역의 양상과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영동의 만세운동은 충청, 경상, 전라도의 접경지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서울의 지도부와 연결되지 않고 농민에 대한 강제노역과 뽕나무 묘목 강제배부 등 경제 착취가 직접적으로 작용해 자체적으로 시작됐다.

1919년 3월 25일 이후 각 면에서 일어난 영동의 3·1 운동은 학산면이 가장 먼저 시작됐다. 발단은 영동-무주간 도로공사 강제노역 동원 등으로 극에 달한 일제의 민족말상정책 등 수탈정책에 기인하며 도로공사 부역에 나섰던 군중들이 양산면민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군중들은 경찰주재소에 돌을 던지는 등 창문과 전화기를 파괴하고 구속된 지사 구출을 시도했으나 출동한 일본의 지원병으로 인해 실패했다. 이로 인해 7명이 체포됐다.

4월 2일부터 6일까지 안준 등이 주도한 매곡 만세운동도 영동에서 빼놓을 수 없다. 당시 독립선언서를 뒤늦게 입수한 안준은 400여 장의 태극기와 베껴 쓴 독립선언서를 들고 밤나무 묘포장 부역군들과 면사무소 마당에서 거사를 치렀다. 3일과 4일은 장날이어서 군중들이 면사무소에서 만세를 불렀고 추풍령 헌병 분견대가 출동해 주동인물을 구속하자 이에 격분한 군중들은 추풍령 분견소까지 추격해 불을 질러 태워 버리는 등 영동군민들은 경찰서와 면사무소 등을 습격하는 격렬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후 매곡면 3·1 운동을 주도한 안준은 체포돼 옥고를 치르고 나와 광복 후 면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1972년 3월 4일 영동읍 로터리에 세운 영동 3·1 운동 기념비는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 시설로 충북에서는 처음이고 전국에서도 두 번째로 세워졌다. 또 1991년 영동읍 주곡리에 `7지사 독립운동 기념비`를 세워 그 빛나는 공을 다시 한번 기렸다.손동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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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 나무 표말.
독립군 나무 표말.
1972년 3월 세워진 영동군 영동읍 계산리에 위치한 `영동 3.1운동 기념비`.
1972년 3월 세워진 영동군 영동읍 계산리에 위치한 `영동 3.1운동 기념비`.
충북 영동군 학산면 박계리 마을 입구에는 `독립군 나무`로 불리는 느티나무.
충북 영동군 학산면 박계리 마을 입구에는 `독립군 나무`로 불리는 느티나무.
충북 영동군 학산면 박계리 마을 입구에는 `독립군 나무`로 불리는 느티나무.
충북 영동군 학산면 박계리 마을 입구에는 `독립군 나무`로 불리는 느티나무.
충북 영동군 학산면 박계리 마을 입구에는 `독립군 나무`로 불리는 느티나무.
충북 영동군 학산면 박계리 마을 입구에는 `독립군 나무`로 불리는 느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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