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하계올림픽이 개최되던 1988년, ETRI는 대덕특구에 반도체실험실을 구축하고 당시 삼성반도체통신, 금성반도체, 현대전자와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던 4M DRAM 개발에 활용했다. 당시 우리의 과학적 역량은 선진국 보다 낮았지만 산·학·연의 협력은 성공적이었으며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이 크게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을 견인하는 빅데이터, 인공지능, 블록체인 등 신산업 육성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빅데이터, 블록체인 등 이와 같은 분야의 효율적인 처리를 위해서는 더욱 우수한 성능의 컴퓨터가 요구된다. 연구자들이 예상하는 미래 컴퓨터 중 가장 우수한 성능을 보일 것으로 예측되는 것은 양자컴퓨터이다. 양자컴퓨터는 원자 단위에서 일어나는 `중첩`과 `얽힘`이라는 양자적 현상에 착안한 것이다. 원자 내 전자나 핵이 갖는 에너지는 불연속적인 값으로 양자화 되어 있고, 확률적으로 중첩된 상태로 존재한다. 중첩의 성질을 이용해 데이터 처리 능력을 향상하고 얽힘의 성질을 이용해 데이터 오류를 정정하는 능력을 갖도록 양자컴퓨터를 구현하면 현존 슈퍼컴퓨터를 능가하는 성능을 얻을 것으로 전망된다.

양자의 중첩과 얽힘 성질을 활용하는 또 다른 기술로 양자암호통신, 양자센서 등이 있다. 양자암호통신은 블록체인을 보다 안전하게 보급하거나 국가 통신망의 해킹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기술이다. 양자 센서는 중력, 자기장, 이미지 등 미세한 신호를 초정밀도로 측정하는 기술이다. 이처럼 양자컴퓨터, 양자암호통신, 양자센서로 대별되는 양자정보통신기술은 미래 신산업으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유럽연합(EU)은 양자물리학을 탄생시킨 주역으로써 과학이 기술과 산업으로 연계되는 2차 양자혁명을 위한 `퀀텀 플래그십 프로젝트`(Quantum Flagship Project)를 올해부터 본격 시작했다. 10년간 10억 유로를 투자하는 대형 사업으로 EU 공동 프로그램(Horizon 2020)에서 50% 재원을 투자하고 각 회원국 정부와 산업체가 나머지 50% 재원을 분담한다. 본 사업은 "실험실의 기술이 시장의 제품으로 성공하도록 역량을 집중한다"고 강조한다. 아울러 과거에 유럽의 CERN이 인터넷 원천기술을 개발했지만 산업화에 실패해 경제적 성과는 미국이 가져간 사례를 들며 양자정보통신 산업은 유럽이 선도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보이고 있다.

EU에 대응해 미국도 `내셔널 퀀텀 이니셔티브`(National Quantum Initiative) 사업을 올해부터 시작하고 있다. 1단계로 5년간 인프라 구축을 목적으로 8억달러의 투자가 시작됐다. 구글, IBM, 마이크로소프트 등은 대학과 공동연구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대학의 과학과 기술을 산업화하기 위해 노력중이다. 미국은 핵심 인프라 구축, 고급인력 양성, 산업경쟁력 강화 등 양자정보통신 산업 전반의 밸류 체인을 조성하고 있다.

양자정보통신은 원자 세계의 물질을 다루는 매우 난이도가 높은 도전적 기술이다. 인적 자원과 연구 환경이 부족한 우리나라에서 도전적 미래 기술의 개발을 위해서는 협력이 가장 필요해 보인다. 과학적 역량을 보유한 대학은 다양한 기초기술을 공급하고 우수한 전문 인력 양성에 힘써야 한다. 이와 함께 정부출연연구원은 기술 공급자 중심에서 벗어나 제품과 서비스를 지향하는 사용자 중심의 기술개발을 실천해야 한다. 또한 산업이 성장할 수 있도록 주요 인프라를 구축하여 기업의 활용을 지원해야 한다. 정부출연연구원 간에도 역할을 분담하고 협력해

부족한 재원과 시설을 공동 활용하여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

우리가 잘할 수 있는 창의적 기초원천기술을 발굴하고, 과학과 기술이 연계될 수 있도록 산·학·연이 함께 협력하는 개방형 체계 구축이 시급하다. 30여 년 전 우리나라에 반도체 산업이 태동하여 현재 국가 경제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경험을 살려 과학-기술-산업이 함께 협연하는 오케스트라와 같은 국가 임무형 사업으로 우리나라가 양자정보통신기술을 확보하는 날을 기대해 본다.

엄낙웅 ETRI ICT소재부품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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