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은 입에 쓰다`라는 속담이 있다. 병이 들면 쓴 약을 먹어야 고치듯 어느 분야든 정상에 오르기까지 심신수련의 고행이 따른다. 이것은 달콤하지만은 않다. 결과가 달콤할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를 멀리하고 단것을 가까이 하려한다. 그러나 이것 없는 성공은 없다. 쉽고, 편하고, 즐기면서 정상에 오를 수만 있으면 오죽 좋으련만……

뜬 금 없이 서예에 무슨 사약(死藥)인가? 병필(病筆)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예술의 한 행위로 여겨 고치려 하지 않는 것이다. 무엇이 병필인가? 건고(乾枯), 전두(顫枓), 거치(鋸齒), 정두(釘頭), 서미(鼠尾), 봉요(蜂腰), 학슬(鶴膝), 첨취(尖嘴) 등이다. 건고는 먹이 지나치게 적거나 운필이 빨라 선이 마르고 윤택한 감각 없이 무미건조한 것이고, 전두는 옛 비석을 임서할 때 깨지거나 떨어져 나간 것을 금석미(金石味)로 잘못 이해해 고의로 덜덜 떨거나 삐뚤삐뚤하고 울퉁불퉁하게 하여 용필의 미감을 파괴함이다. 거치는 지나친 측봉(側鋒)을 사용하여 선의 한쪽이 톱니 모양인 것이다. 정두는 기필(起筆)할 때 역입장봉(逆入藏鋒)을 하지 않고 무리한 힘을 사용하여 못의 머리 형상이 된 것이며, 서미는 필력을 끝까지 보내지 못해 획의 끝이 쥐꼬리 형상으로 뾰족하게 된 것이다. 봉요는 세로획이나 가로획의 기필과 수필(收筆)을 지나치게 무겁게 하여 중간은 가늘고 양 끝은 종기 모양이 되어 벌의 허리 같이 된 것이다. 학슬은 전절처(轉折處)가 학의 무릎 형상이 된 것이고, 첨취는 기필에서 역입장봉을 하지 않고 수필에서도 회봉(回鋒)을 하지 않아 중간은 굵고 양 끝은 뾰족한 모양이다. 이외의 병필은 이루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사람들은 몸에 병이 들면 곧바로 치료하러 갈 줄은 알지만 병필을 고치려하는 이는 드물다. 맹자는 이를 마음의 작용으로 보았다. 그는 "무명지(無名指)가 굽어서 펴지지 않는 것이 아프거나 일에 해가 되지 않건만은 만일 이것을 펴 주는 사람이 있으면 진(秦)·초(楚)의 길을 멀다고 여기지 않고 찾아가니, 이것은 손가락이 남들과 똑같지 않기 때문이다. 손가락이 남들과 똑같지 않으면 이것을 싫어할 줄 알되 마음이 남들과 똑같지 않으면 이것을 싫어할 줄 모르니, 이것을 일러 류(類)를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만사가 옳게 보이지 않듯, 글씨도 점획이 병들면 결구도 장법도 건강하지 못하니 어찌 좋은 작품이 되겠는가?

`논어` `옹야`편에 이런 말이 있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 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 사람들은 즐기는 것이 가장 좋다고 여긴다. 하지만 즐기려면 좋아해야 하고 좋아하려면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서예 연마과정도 즐거울 수만은 없다. 고행 없는 수련은 없다. 수행과정의 고통을 참지 못하고 편안함에 매료됨이 또 하나의 사약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비단 서예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발레리나의 발가락을 보았는가? 세계를 제패한 레슬링이나 유도선수의 귀를 보았는가? 그들의 발가락이나 일그러진 귀는 영광의 훈장인가 몸의 상처인가? 그들이 고행을 극복했다는 증거이다.

그러면 생약(生藥)은 있는가? 있다. 전일(專一)하는 것이다. 부단히 이론을 탐구하고 수련하여 습기, 유행, 편리, 명예의 유혹을 물리치고 일로매진하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빨리 이루려고 한다. 한 가지 공부가 끝나기도 전에 다음 단계를 생각하고 또 이것이 다져지기도 전에 명예를 구하려 한다. 때를 기다리지 않고 익기도 전에 따면 그동안 길러온 과일만 버릴 뿐이다. 급한 마음 속이 천 갈래 만 갈래이다. 장자(莊子)가 말한 "마음 씀이 분산되지 않아야 신명(神明)에 응집할 수 있다"는 것이 이를 가르친 것이다. 지금까지 전일하지 않았으면 이제부터라도 시작해보면 어떨까?

송종관 서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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