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20년 전 이 즈음 구제금융사태의 그늘은 짙었다. 달러를 내준 국제통화기금(IMF)은 저승사자처럼 굴었다. 국가부도 위기를 겨우 넘기자 거리는 실업자로 넘쳐났다. 혹독한 구조조정과 더불어 금 모으기 운동 같은 국민의 희생이 더해져 위기를 탈출하기까지 고통의 터널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당시 부모가 실직하면서 유치원을 그만 둔 꼬마들이 청년이 돼 일자리를 찾아 방황하는 게 오늘의 현실이니 씁쓸하다.

구제금융 위기가 뼈저린 건 자초한 때문이다. 대외적 요인에서 비롯된 석유 파동이나 글로벌 금융 위기와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정부는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 "펀더멘텔은 문제 없다"고 큰 소리 쳤다. "외환보유액이 305억 달러 수준"이라고 실상과 다른 통계치를 들이대며 여유를 부렸다. IMF와 합의가 이뤄진 그 해 12월, 가용 외환보유액은 89억 달러에 그쳤다.

우리는 고통을 너무 쉽게 잊고, 교훈을 외면하는 게 아닐까. "한국 경제가 침체 국면의 초입에 들어섰다"는 경고음이 나온 게 지난 5월이다. 다름 아닌 김광두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이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한 고언이다. 남북대화에 매달려 5개월을 허송세월한 지금 상황은 악화일로다. 증시는 한 달 사이 300조 원 가까이 날아가면서 실물경제에 불안 바이러스를 옮기고 있다. 이 지경인 데 "연말까지 기다려 달라"는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경기추락 징후는 다른 지표로도 뚜렷하다. 한국은행은 올해 두 차례 낮춘 끝에 성장률을 2.6%로 내다봤다. 고용 시장은 꽁꽁 얼어붙었다. 6개월 넘게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장기실업자가 올 들어 9월까지 15만 명이 넘는다. 관련 통계 작성에 나선 1999년 이후 최대 규모다. 기업경기실사지수(BSI)라고 예외는 아니다. 한국경제연구원 조사 결과 11월 전망치가 90.4를 기록해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주요국 가운데 유일하게 뒷걸음질이다.

믿었던 수출마저 심상치 않다. 대미·대중 수출 비중이 40%에 육박하는 우리로선 G2 무역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질 판이다. 일등 효자인 반도체는 고점 논란에 휩싸였고, 고임금에 허덕이던 자동차는 연일 `어닝 쇼크`를 전하고 있다. 우리 경제를 나 홀로 떠받쳐온 수출이 흔들린다면 그나마 비빌 언덕이 사라진다. 삼각, 사각 파고 앞에서 활로를 찾을 수 있을까.

우리와 달리 미국은 기업 실적을 바탕으로 순풍에 돛을 올렸고, 영국 등 다른 선진국은 `완전 고용`을 합창하고 있다. 미 금리인상 한 방에 훅 간 터키와 아르헨티나는 반면교사다. 그런데도 무상 포퓰리즘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지방·중앙정부는 같은 길을 간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추진 중인 고교무상교육만 하더라도 5년 간 7조 9600억 원이 소요된다는 국회예산정책처의 분석에 오불관언이다. 곳간이 빈들 다음 세대 일이라는 무책임이다.

퍼펙트 스톰을 마주하고 있는 현실에서 선장의 리더십이 절실하다. 궤도를 수정하라는 시그널을 한 귀로 흘릴 일이 아니다. 소득주도성장 정책으로는 거센 파도를 헤쳐 나갈 수 없음이 이미 드러났다. 초단기 아르바이트로 채워 넣기 급급한 고용 대책을 바라보는 국민은 답답하다. 과감한 규제혁파와 노동개혁을 하지 않고는 일자리도, 성장 동력도 만들지 못 한다.

구제금융 당시의 지표는 구조조정의 기회를 놓치면 그 여파가 얼마나 장기적으로 치명상을 입히는 지 잘 보여준다. 98년 11월에서 다음 해 2월까지 임금근로자 약 169만 명이 추가로 일자리를 잃었다. 4인 가족으로 따지면 600만 넘는 국민이 피눈물을 흘렸다. 인기를 포기한 채 밀어 붙이는 `철도·공공·교육개혁`(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친기업`(아베 일 총리), `인더스트트리 4.0`(메르켈 독일 총리)은 무얼 시사 하나. 경제정책 전반을 재점검하고, J노믹스를 손질해 시장의 신뢰부터 회복하는 게 급선무다. 경제가 망가지면 북의 비핵화도, 한반도 평화도 꽝 아닌가.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송신용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