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주나라의 선왕은 닭싸움을 좋아한다. 왕은 당대 최고의 투계 조련사인 기성자에게 싸움닭의 조련을 부탁한다. 열흘 정도가 지난 뒤 왕은 닭이 잘 훈련하고 있는지를 묻는다. 그러자 기성자는 닭이 아직 허세를 부리고 교만해 자신의 기운만을 믿고 있다고 말했고 열흘이 지나자 왕은 다시 물었다. 이에 기성자는 아직도 다른 닭을 노려보고 공격적이라서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낸다고 답한다. 조련을 시작한지 한 달이 지나서야 기성자는 만족함을 보이며 왕에게 닭을 바치며 말한다. 이제는 다른 닭들이 싸움을 걸거나 울어도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아서 마치 나무로 만든 닭과 같이 완전한 덕을 갖췄다[木鷄之德(목계지덕)]는 것이다. 『장자』, <달생>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목계지덕의 교훈은 현대인들에게 자만을 경계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는 자신을 낮춰 적을 교만하게 만들어버리는『손자병법』에 `비이교지(卑而驕之)`의 전략을 연상케 하는데, 자신의 허술함을 노출해 상대를 교만에 빠지게 하는 속임수가 핵심이다. 교만한 사람은 상대를 깔보고 업신여기기 때문에 상대를 자만하게 해 경계심을 무너뜨려서 상황을 나에게 유리하도록 하는 방법인 것이다. 부견의 100만 군대가 사현의 8만 군대에게 패배한 것도,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그러한 것 모두 패인의 공통점이 자만이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자만이 필패(必敗)를 불러온다는 당위성은 경종을 울리며 이렇게 회자되는 것이다.

자만한 군상들은 주변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근거도 없는 교만함이 하늘을 찌르며, 어울리지도 않는 신분에 올라앉은 오만방자한 속인들을 고개만 몇 번 돌려도 쉽게 접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을 향해 나잇값 운운하는 것도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는지 주변 사람들은 그러려니 방관 일색이다. 그것이야말로 심각한 병인데, 본인만 그 병의 위중함을 모르니 애석하기도 하다.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병이라 인지하지 못할 정도의 그릇밖에 안 될 위인(?)이라서 그런 것은 아닐까.

지혜로운 사람은 어리석고, 용감한 사람은 도리어 겁이 많은 법이다. 이는 역설(逆說)의 표현이 아니라 힘줘 역설(力說)해야 할 진리이기도 하다. 지(智)와 용(勇)을 갖춘 이들은 내면의 덕을 견지하며 자신의 지혜나 용기를 함부로 드러내지 않는 고수의 품격을 보이는 것이다. 반면 하수는 보잘 것 없는 실력을 뽐내는 것에만 주력한다. 옹졸한 자존심과 저급한 교만함으로 자신을 알아주기만을 강요하고,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출한다. 자신을 높이고 싶어만 하지 낮출 줄은 모른다. 정작 자신의 가치는 내가 스스로 높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낮추고 타인이 높여줄 때 고수의 품격이 드러난다는 것을 속인들은 간과하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고수가 되기를 원한다.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은 것은 희망이 아니라 본능에 가깝다. 진정으로 최고의 자리에서 가치를 인정받고 싶다면 자신의 감정선을 고르게 해 초연함을 유지하는 덕을 갖춰야 할 것이다. 스스로를 낮추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서 우리의 영혼에 겸손함을 채울 수 있어야 한다. 자만(自慢)으로 가득 채운 독배를 멀리 하고, 자비(自卑)의 덕을 채운 축배를 드는 인간이 되도록 늘 노력해야만 하는 것이다.

사람의 영혼은 70% 이상이 자만으로 가득 차 있지만, 이것을 30%의 양심이 억누르고 있을 때 겸손함을 유지해 나갈 수 있다고 한다. 그만큼 겸손함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의미일 것이다. 자만은 우리 인간이 조금만 방심해도 언제든지 몸 밖으로 빠져나올 준비를 하고 있으므로 항상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조금만 방심해도 영혼을 약하고 게으르게 만들어서 결국 스스로를 망치게 하는 요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자만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겸손은 `아무나` 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

김하윤 (배재대학교 주시경교양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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