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독립립운동 유적지를 가다 ⑧보령 녹도·주산 주렴산 3·1운동 만세 시위지

충남 보령지역의 의병활동은 섬 지역에서부터 시작됐다. 오천면 녹도에서 주민을 보호하기 위해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된 군인들이 일본군을 사살한 정미의병(丁未義兵)을 시작으로 주산 주렴산 만세운동까지 의병활동과 나라를 되찾기 위한 주민봉기는 지역을 가리지 않고 곳곳에서 일어났다.

◇녹도 포구의 전투

1907년 녹도 포구에서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된 한국군인들이 일본 상선에서 벼를 빼앗고 조사 나온 일본군 10여명을 사살한 정미의병(丁未義兵) 활동상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오천면의 부속도서인 녹도에는 1907년 당시 많은 조기가 잡혀 파시가 형성돼 많은 상인들이 드나들어 주민들의 보호를 위해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된 홍주분견대 출신 한국군인 4-5명이 거주하게 됐다.

군인들은 먹을 식량이 충분하지 못해 군산과 인천을 오가는 일본 화물선에서 벼를 빼앗기로 하고 녹도 인근 화사도 부근에서 일본 화물선에 총을 쏘아 정지시키고 벼를 빼앗았으며, 이에 군산에 있던 일본 순사와 수비병, 통역 등 10여 명이 녹도에 찾아와 주민들을 괴롭히자 밤에 모두 사살하고 무기와 탄약을 노획한 것이다.

일본군을 사살한 한국군인들은 일본군의 보복이 두려워 주민들을 안면도와 보령 방면으로 대피시켰으나 당시 이장 전씨와 3명의 청년, 나이가 많은 몇 사람만이 섬을 지키고 있었다. 일본군은 그해 9월 14일 경찰관 3명, 수비대의 부수중대장 이하 부대원 전원, 급히 모집된 의용군 등이 2차로 출동해 이장 전씨를 칼로 내리쳐 팔을 잘라 죽이고 마을과 배를 모두 불태우고 인근 호도와 삽시도까지 수색하고 당산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보령시는 지난해 녹도 포구에 항일의병을 기리기 위한 전적비를 세웠다. 일본군 수비대 10여 명을 녹도 포구에서 사살한 정미의병 활동상을 널리 알리고 항일의병 전적지로서의 숭고한 가치를 재 조명하기 위해서다.

◇주산 주렴산 만세운동

주렴산 만세운동은 서울에서 배재고등학교에 다니던 주산 증산리 출신의 이철원(李哲源)이 학생전위대로 독립운동을 하던 중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난 후 왜경의 감시가 심해지자 이를 피해 고향인 보령 주산에 내려왔다가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심하고 동지들을 모으고, 태극기도 만들며 거사를 준비했다.

이때 모은 동지들은 대부분 인근 마을에 사는 이철원의 친인척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시골의 사정상 비밀유지에 유리하고 쉽게 접촉이 가능한 이유였다.

이들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3월 15일(음 2월 16일) 간치(주산) 장날에 거사 하기로 계획했으나 사전에 기밀이 누설되어 장터 곳곳에 왜경들의 감시가 삼엄하자 거사하지 못하고 다음날인 3월 16일 밤 주렴산 국수봉에 올라가 횃불을 밝히며 태극기를 산 정상에 꽂고 독립선언서에 혈서로 서명한 후 징을 치며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만세소리를 들은 산 아래 마을 주민들도 호응하여 만세를 부르며 산에 오른 것이다.

다음날 다시 야룡리 복개봉에서 만세를 부르기로 했으나 만세운동에 참여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경에 체포되고 연행됨에 따라 야룡리에 사는 박윤화 혼자 복개봉에 올라가 태극기를 꽂고 만세를 불렀다.

이후 왜경에 체포된 애국지사들은 모진 고문을 당했고 며칠 후 홍성구치소에 수감됐으나 모두 "나라의 독립을 위해 만세를 부른 것이 무슨 죄가 되느냐"며 호통을 치기도 했다.

43일간의 혹독한 고문 끝에 소위 보안법위반이라는 죄명으로 태형(笞刑) 60-90장씩 받고 풀려났을 때는 모두 엉덩이 살이 해어지고 팔다리를 못쓰게 되어 걸어 나올 수 조차 없어 교자(轎子)를 타고 나왔으며 장독의 후유증으로 만세운동에 참여한 윤용원은 출소 후 한 달 만에 3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다른 사람들도 많은 고생을 했다.

당시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이철원과 윤천영은 체포되지 않았고 이철원은 해외로 망명했다가 해방 후 돌아와 대한민국의 제2대 공보처장을 지냈다.

보령시는 주렴산 국수봉에서 있었던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지난 2000년부터 매년 추모행사를 거행해 오고 있다.

◇독립운동의 대표인물

이철원(李哲源)은 주산면 증산리에서 태어나 주산 옥성학교를 졸업하고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 3학년 때 3.1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에서 가담하였다가 고향 주산에 내려와 마을의 친인척들을 규합해 주렴산에 올라가 만세 시위를 주동했다.

왜경의 검거를 피해 빠져나갔다가 그해 5월 상해로 망명했으며 중국 금릉대학에서 수학하고 1920년에는 뉴욕 콜롬비아 대학에서 수학, 1933년에는 같은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재학 중 철학박사 학위도 취득했다. 1934년 귀국하여 1937년에는 흥업구락부사건으로 투옥되고,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남 홍원에서 피체, 1943년에 북경으로 탈출하였다가 8·15해방 후 귀국하여 미군정청공보부장, 제2대 대한민국공보처장을 지냈다.

국채보상운동을 제의한 김광제(金光濟) 선생은 보령 웅천읍 평리 출생으로 1896년 이세영 황재현 등과 함께 남포에서 의병을 일으켜 남포성을 공격했다가 실패하고 서울로 피해 상경했다.

1907년 대구에서 출판사인 광문사 사장으로 있으면서 부사장 서상돈과 함께 `국채일천삼백만환보상취지서(國債一千三百萬珤報償趣旨書)`라는 격문을 전국에 발송해 국채보상운동을 제의했다. 그 요지는 대한국민 2000만 명이 담배를 끊어 1개월간 담배값 20전씩을 3개월 저축하면 1300환이 되므로 전국민이 3개월간 단연 등을 통해 이완용 내각이 일본으로부터 차관한 1300만 환을 갚아서 경제적 예속으로부터 벗어나자는 것이었다.

이 운동은 서울에서 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 등 민족언론기관들의 적극적 호응을 얻어 전국적 운동으로 발전해 한말국권회복운동 가운데 중요한 운동의 하나가 되었다.

1910년 만주로 망명, 압록강 대안의 동로홍묘자에 일신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취임해 교육구국운동에 헌신했다. 3·1운동 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1920년 3·1운동 1주년을 맞이해 유학생들과 제2의 독립선언서를 작성, 국내외에 배포하고 제2의 3·1운동을 일으키려다 일본경찰에 잡혔다.

사망 후 마산에 안장되었으나 1927년 고향 보령의 평리로 이장했고, 1947년 추모비를 세우고 2015년 보령시 동대동에 김광제 선생 동상공원을 건립했다. 최의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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