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학생이 병원을 찾은 적이 있었다. 증상은 우울, 불안, 초조, 자신감 부족 그리고 자살을 하고 싶은 생각 등이었다. 환자는 자신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친구들에게 피해만 주는 사람이고, 선생님에게는 부끄러움만 주는 학생이라고 했다. 엄마와 아빠에게는 짐만 되는 딸이라고 했다. 환자는 면담시간 내내 눈물을 흘렸고 자신이 죽는 것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또 자기 자신을 위해서 더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환자의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한 이후 술에 빠져 살고 있었다. 어머니는 마트에서 일을 하고 가사 일까지 하면서 힘들게 살고 있었지만 틈만 나면 밤에 나가서 새벽에 들어오곤 했다. 부모는 매일 같이 서로 소리를 지르고 싸웠다. 남동생은 가출, 음주를 밥 먹듯이 하고 있었고 도둑질을 해서 벌써 여러 번 경찰서에 잡혀가기도 했다. 그러면서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리고 남동생마저도 뭔가 집에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이 여학생 탓을 했다. 우리 집안이 이렇게 된 것이 너 때문이라고,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누나 때문이라고 탓을 했다. 결국 집안에서 가장 힘도 약하고 여리고 또 착한 이 학생이 우울증에 걸리게 된 것이다.

이 가정에서 학생은 모든 잘못된 것을 뒤집어쓰는 희생양(Scape goat)이 되고 환자가 된 것이다. 가족체계이론(Family system theory)에서는 이렇게 가족 내 다른 가족구성원들에게 문제가 있고 이 관계에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구성원 중 어느 한명에게 그 문제들을 뒤집어씌워 증상을 가진 환자로 만들어 버려 자신도 모르게 환자가 된 것을 `지정된 환자(Idntified patient)`라고 한다. 이 학생의 가정에서도 실제로 문제가 있는 사람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남동생인데 정작 그 사람들 스스로는 자신에게 아무 문제도 없다고 생각을 하고 이 학생만 문제가 있는 우울증 환자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도 이 학생의 가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모든 국가, 모든 사회에는 작게는 사람과 사람 간, 크게는 사회의 한 집단과 다른 집단 간에 문제가 있고 갈등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 사회에도 침체된 경제상황, 남북 간의 문제, 노동과 연관된 문제, 교육과 연관된 문제 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문제들이 있다. 뿐만 아니라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간의 갈등, 남성과 여성 사이의 갈등, 권력이 있는 사람들과 권력이 없는 사람들과의 갈등, 보수적인 집단 간의 갈등 등 수많은 갈등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나 갈등의 원인은 내부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문제와 갈등의 원인이 바로 내 자신, 내 집단 내에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거나 인정하지 않고 이를 뒤집어씌워서 `희생양`과 `지정된 환자`로 만들 다른 사람 또는 다른 집단을 찾는다. 때로는 정권의 큰 실수 또는 부정부패로 정권의 위기가 초래될 경우, 의도적으로 사회의 한 집단을 희생양 혹은 지정된 환자로 만들어서 정권으로 향하는 국민들의 분노를 그 희생양으로 돌리기도 한다. 로마황제 네로가 로마시내에 큰 불이 나서 민심이 흉흉할 때 기독교인들을 희생양으로 삶은 것이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개인 혹은 우리가 희생양으로 삼은 사람이나 집단을 찍어 누르거나 또는 그 집단이 없어진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내 문제 또는 우리의 문제는 더욱 심해지고 곪을 대로 곪아서 나중에는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무너지게 할 뿐이다. 내가 겪고 있는 문제와 어려움 그리고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어떤 사람을 또는 어떤 집단을 희생양, 지정된 환자로 만들어서 내 문제, 우리의 문제를 그 사람 또는 그 집단에 뒤집어씌우는 것을 멈춰야 한다. 그리고 인정하기가 죽을 만큼 싫더라도 문제의 원인이 내 자신, 우리 집단에게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 때서야 비로소 내가 겪고 있는 어려움과 고통,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창화 을지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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