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정에서 학생은 모든 잘못된 것을 뒤집어쓰는 희생양(Scape goat)이 되고 환자가 된 것이다. 가족체계이론(Family system theory)에서는 이렇게 가족 내 다른 가족구성원들에게 문제가 있고 이 관계에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구성원 중 어느 한명에게 그 문제들을 뒤집어씌워 증상을 가진 환자로 만들어 버려 자신도 모르게 환자가 된 것을 `지정된 환자(Idntified patient)`라고 한다. 이 학생의 가정에서도 실제로 문제가 있는 사람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남동생인데 정작 그 사람들 스스로는 자신에게 아무 문제도 없다고 생각을 하고 이 학생만 문제가 있는 우울증 환자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도 이 학생의 가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모든 국가, 모든 사회에는 작게는 사람과 사람 간, 크게는 사회의 한 집단과 다른 집단 간에 문제가 있고 갈등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 사회에도 침체된 경제상황, 남북 간의 문제, 노동과 연관된 문제, 교육과 연관된 문제 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문제들이 있다. 뿐만 아니라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간의 갈등, 남성과 여성 사이의 갈등, 권력이 있는 사람들과 권력이 없는 사람들과의 갈등, 보수적인 집단 간의 갈등 등 수많은 갈등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나 갈등의 원인은 내부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문제와 갈등의 원인이 바로 내 자신, 내 집단 내에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거나 인정하지 않고 이를 뒤집어씌워서 `희생양`과 `지정된 환자`로 만들 다른 사람 또는 다른 집단을 찾는다. 때로는 정권의 큰 실수 또는 부정부패로 정권의 위기가 초래될 경우, 의도적으로 사회의 한 집단을 희생양 혹은 지정된 환자로 만들어서 정권으로 향하는 국민들의 분노를 그 희생양으로 돌리기도 한다. 로마황제 네로가 로마시내에 큰 불이 나서 민심이 흉흉할 때 기독교인들을 희생양으로 삶은 것이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개인 혹은 우리가 희생양으로 삼은 사람이나 집단을 찍어 누르거나 또는 그 집단이 없어진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내 문제 또는 우리의 문제는 더욱 심해지고 곪을 대로 곪아서 나중에는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무너지게 할 뿐이다. 내가 겪고 있는 문제와 어려움 그리고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어떤 사람을 또는 어떤 집단을 희생양, 지정된 환자로 만들어서 내 문제, 우리의 문제를 그 사람 또는 그 집단에 뒤집어씌우는 것을 멈춰야 한다. 그리고 인정하기가 죽을 만큼 싫더라도 문제의 원인이 내 자신, 우리 집단에게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 때서야 비로소 내가 겪고 있는 어려움과 고통,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창화 을지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교수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