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구나 군중 속에 숨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로 특별한 책임감이나 의무감 없이 편안하고 자유롭고 싶습니다. 특히 그것이 불가능한 상황에 처해지면 평범하고 일상적이고 때로는 지루하고 답답하게 여겨졌을 수도 있는 익명성의 자유가 더욱 절실해지기 마련일 것입니다.

두 개의 영화가 있습니다. `마이티`와 `원더`입니다. 두 영화 모두 필브릭 로드맨의 `프릭 더 마이티`, 그리고 R.J.팔라시오의 `원더`라는 베스트셀러 원작소설을 영화로 만든 작품입니다.

각각 1998년과 2017년에 만들어진 두 영화는 거의 20년이라는 시간의 간격을 두고 만들어졌습니다. 비록 시대는 다르지만 두 작품 모두 은은한 감동을 주고 있음과 동시에 그 긴 시간 속에서도 변하기 힘든 사람 사는 세상 속의 그 어떤 어려움에 대한 질문과 도전을 던지고 있습니다.

영화 마이티는 서로의 몸과 머리가 되어주는 두 아이들의 이야기입니다. 관절의 기형과 구축을 유발하는 모르쿠오 증후군을 갖고 태어난 열세 살의 `케빈`은 척추가 휘어 등위로 두드러지게 튀어나와 있습니다. 또래보다 훨씬 외소하고 팔에 끼는 목발 없이는 걷지 못합니다.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는 케빈이 새롭게 이사한 곳 옆집에는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어른같이 큰 체구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책도 읽지 못하는 동갑네가 소년 `맥스`가 살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몸이 불편하지만 수재인 케빈을 맥스의 학생 개인 교사로 지정해줍니다. 사소한 오해로 시작이 좋지 않았던 두 소년은 곧 단짝 친구가 됩니다. 맥스는 케빈으로부터 글 읽기뿐만 아니라 세상에 대한 용기까지 배우게 됩니다. 케빈을 자신의 어깨위에 앉혀 목마를 태우고 다니기 시작하는 맥스. 두 사람은 각자는 할 수 없었던 다양한 모험들을 함께 시도합니다. 학교에서도, 길에서도 두 사람은 서로의 부족함을 메꿔 가며 `freak(괴물)`이라는 별명에도 아랑곳 않고 그동안 누리지 못한 소년기의 즐거움들을 찾기에 몰두합니다. 그러나 케빈은 뼈의 성장은 멈추었는데 장기의 성장은 정상적인 속도로 진행되고 있어 장기가 받는 압박이 커지면서 건강이 점점 더 악화되고 있습니다.

영화 원더의 주인공 `어거스트`는 남들과는 조금 다른 외모를 갖고 있습니다. 어거스트가 태어나는 순간 분만실에는 정적이 흐르고 의사는 기절합니다. 간호사는 신생아를 엄마가 보지 못하도록 안고 분만실 밖으로 뛰어나간다. 안면기형을 갖고 태어난 어거스트는 스물일곱차례의 안면 성형수술과 그 외의 잦은 병치레로 열 살이 되도록 학교에 다녀보지 못한 소년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길을 걸을 때, 사람들이 나를 보곤 곧 어딘가 멀리 보는 척하며 자신들의 시선을 감추는 걸 하지 않는 것이다" 어거스트의 어머니는 특히 과학에 재능을 보이는 아들을 자신이 홈스쿨링으로 가르치는 것에 한계를 느끼고, 어거스트를 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장난감 우주인 헬멧을 쓰기를 즐기던 어거스트는 이제는 헬멧을 벗고 남들과는 많이 다른 얼굴로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일상적인 것과는 다른 것, 흔하지 않은 것, 익숙하지 않은 것에 시선을 빼앗기는 것은 어쩌면 생존을 위한 본능일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시각을 통해 주변을 파악하고 안전하고 익숙한 활동들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상적인 시각정보들 속에서 평소와는 다른 정보는 일단 우리의 시선을 뺏게 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과는 다른 외모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물론 교양이 있는 사람들은 곧 그런 자신의 시선이 사회적으로 예의에 어긋난다는 뒤늦은 인식에 얼른 자신의 시선을 감추려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시선을 받는 이들에게는 시선을 의도적으로 돌리는 그 행동과 표정까지도 정상적이고 평범의 부류에 끼지 못하는 고통에 일조하는 작은 생채기들이 되고 맙니다.

우리의 어쩔 수 없는 반사적인 반응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 내야 할까요.

어거스트는 말합니다. "내 생각은 이렇다. 내가 평범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아무도 나를 평범하게 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나도 남들에게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 그리고 그들이 나를 보고 짓는 표정에 익숙해졌다"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런 것은 익숙해지는 그 무엇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이 박수와 열광의 그것이라고 해도, 주목과 집중과 시선은 부담스럽고 힘들 수 있는 것인데, 하물며 놀람과 경계의 시선일 때, 끊임없이 나와 내 가족을 구분하고 밀어내거나 또는 동정하는 세상의 시선이라는 것이 익숙해질 수 있는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각기 다른 모양새와 생각을 갖고 살고 있습니다. 다양한 광고들은 `우리의 제품을 통해 당신만의 개성을 찾으세요. 우리의 제품으로 남들과 다른 당신을 표현하세요`라고 끊임없이 말을 걸어옵니다. 사람들도 서로의 개성과 취향을 존중하자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말을 좀 더 많이 걸어주었으면 합니다. `정상의 반대가 반드시 비정상일 필요는 없습니다. 세상에는 특별하고 그래서 아름다운 것들이 많습니다. 놀라지 마세요. 그리고 사랑의 눈으로 바라봐 주세요`라고 말입니다. 이현진 극동대학교 미디어영상제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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