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아침 공기가 쌀쌀하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일지라도 여전히 사람들의 움직임은 끝이 없다.

생각해 보니 지난여름은 무척 더웠다. 가만히 앉아있어도 땀이 흘렀다. 그 덕분에 내가 배운 것은 에어컨이 있는 세상과 에어컨이 없는 세상으로 구분하는 일이었다. 몸으로 직접 다가서는 일은 체험이라는 경계를 넘어 어느덧 분별이 돼버렸던 것이다. 더위는 싫었다. 그만큼 에어컨은 좋았다.

어느덧 쌀쌀한 가을을 맞이하며 지난여름을 돌이켜 보니 시간의 흐름 속에 부끄러움을 접을 수 없었다. 더불어 계절의 변화도 새삼 나의 일상 앞에 놓인 인연이라는 생각을 더하는 계기가 됐다.

수년전 스리랑카를 갔었다. 우리 종단인 대한불교진각종이 그곳에 작은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이어 중·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이를 기념하는 행사에 동참한 것이었다. 개교를 축하하러 간 길이었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현지인들의 복장과 맑은 날씨였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었다.

"이곳 사람들은 항상 여름옷만 입어도 되나보다.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과 겨울, 사계절이 있어 우리나라는 참 좋은 나라라고 알고 있었는데 참 좋은 나라지만 봄에는 봄옷을, 여름에는 여름옷을 가을과 겨울도 각각 준비해야 한다. 우리나라가 좋은 것인가? 아님 그냥 여름옷만 가지고 살아도 되는 이곳이 좋은 것인가?"

사실 스리랑카가 좋았다. `우선 여러 벌의 옷을 구입하지 않아 경제적으로 좋다. 그리고 여름의 더위와 겨울의 추위를 겪으며 봄 혹은 가을이 좋다고 분별하지 않아서 좋다`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다가올 추위를 생각하자니 역시 스리랑카가 좋은 것 같다.

더위 지나 다가올 추위를 걱정하며 여름옷은 접어 개고 가을 옷을 꺼내어 펼쳤다. 그러면서 `나의 마음도 옷과 같이 개었다가 새로이 다음 해에 꺼내어 펼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우리의 마음도 부족함이 있으면 반성을 하듯이 접어두었다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숙성시켜 어느덧 무르익으면 수행하듯 펼칠 수는 없을까?

우리는 마음을 내가 좋아하는 것에는 펼치고 내가 싫어하는 것에는 철지난 옷을 개듯 접는다. 이를 달리 이기적이라 하지만 사실 생명체의 본능이다. 그 본능을 잘 다스리듯 마음을 접어 옷처럼 개었다가 알맞은 시기에 다시 꺼내야 한다. 이러한 행위를 흔히 `지혜`라고 한다. 사실 이러한 지혜의 시작은 나의 마음을 다스려 부적당한 시기에는 참거나 기다려야하며 적당한 시기에는 함께 공감의 자세로 드러내어야 한다.

하지만 이는 쉽지 않다. 옷이야 시기에 따라 접어 개거나 펼쳐 입으면 된다. 실수를 하더라도 하루 정도 불편하면 되지만 나의 행위를 이끄는 마음은 다르다. 나의 잘못된 말과 행동은 나 자신뿐만 아니라 누군가에게 긴 시간 불편함을 가져다준다. 그 불편함은 깊이에 따라 우리는 철 지난 옷을 잊고 옷장에서 꺼내지 않듯이 자신의 잘못을 잊어버린다. 사실 이러한 일은 흔하다. 불필요하고 미안하면 잊어버린다. 회피다. 사실 회피(回避)는 우리에게 아니, 나 자신에게 이기적인 편리함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그뿐이다.

이제 다시 가을 옷을 펼쳐 입는다, 그리고 조만간 겨울옷을 꺼내어 펼칠 것이다. 옷을 접듯 자신에게 부족함이 기록된 마음을 새로이 펼친다면 기도하듯 숙성이 잘 되었는지 저마다의 삶을 살펴야 한다.

앞서 여름옷 한 벌이면 됐던 스리랑카의 편리함과는 달리 계절의 변화에 답해야 했던 우리나라의 4계절은 단순하지 않다. 우리의 삶도 단순하지 않다. 사계절의 수많은 옷에는 비교할 수 없는 다양함이 우리의 삶을 채우고 있다. 옷을 접어 개듯이 자신의 마음을 접어 타인을 배려하고 이해해야 한다. 나아가 나와 타인에게 이로운 일은 새 옷을 펼쳐 입듯이 실천으로 이끌어야 한다. 물론 그 과정 속에 깊이 생각하고 타인을 생각하는 습관이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더불어 마음이 옷과 같다면 부끄러움도, 미안함도, 아쉬움도 적을 것이라는 희망을 상상해본다. 원명 대전불교총연합회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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