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계에 몸담고 있는 저로서도 올해는 특별한 한 해였습니다. 연초에 평창에서 시작된 비엔날레 투어가 서울과 대전, 공주를 거쳐 광주와 목포로, 다시 창원과 부산, 대구로 이어졌습니다. 올 한 해에만 전국에서 8개의 비엔날레가 개최된 것입니다. 작년 말에 열린 제주비엔날레까지 친다면 서울에서 제주까지 대한민국 전역이 그야말로 비엔날레로 물든 겁니다.

아시겠지만 비엔날레는 미술이라는 특정 장르와, 2년 마다 열리는 비엔날레라는 형식이 만나 만들어진 국제미술전시회를 뜻합니다. `모든 비엔날레들의 어머니`로 불리는 베니스 비엔날레를 포함하여 지금 전 세계에는 200여개가 넘는 비엔날레가 개최되고 있습니다. 비엔날레가 갑자기 이렇게 많아진 것은 1989년 이후의 일입니다. 전후 50년간 지속된 동서 냉전이 극적으로 와해되면서 전면적으로 세계화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문명의 출현으로 가상세계와 실재계의 경계가 허물어져 버렸습니다. 인류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이 두 가지 사건이 모두 1989년에 일어난 것입니다. 역사학에서 post 89 라고 부르는 이 새로운 시공간, 세계화와 디지털이라는 거대한 변화와 충격에 대한 미술인들의 공동 대응이 비엔날레였습니다. 비엔날레는 다양한 인종, 다양한 국적, 다양한 종교적 배경을 가진 작가와 학자들이 모여서, 모든 경계와 차이를 넘어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사유하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과 해결책을 모색하는 실험적이고 급진적인 공간이었습니다. 그래서 미술계에서는 지난 30년을 `사회과학적 비엔날레 전성시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도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국가관을 만들고 같은 해에 광주비엔날레를 시작하면서 이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post 89를 기점으로 우리는 이전 인류가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화된 문화의 영토에 살고 있습니다. 세계화와 다문화주의, 혼성된 정체성은 우리 시대의 특징이자 새로운 보편성이 되었습니다. 이 새로운 보편성은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차이와 경계, 가상과 실재, 시간과 공간이 한꺼번에 뒤섞이면서 마침내는 작가들의 작품도, 각종 비엔날레도 점점 차별성과 정체성을 잃어갔습니다. 예술이 새로움을 창조할 수 있다는 믿음을 상실했듯이, 비엔날레도 더 이상 비판과 저항의 장이 될 수 없음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근에 만들어진 신조어가 비엔날레 피로감을 호소하는 Biennihilism 이라는 단어입니다.

지금 한국의 비엔날레도 같은 문제에 직면해있습니다. 도시와 공동체를 압도하는 거대한 스케일이 유일한 자랑꺼리거나, 지역 미술인들의 욕망을 채우는 이기적 도구이거나, 주제와 형식을 여기저기서 표절하고 혼성한 복제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문제들 말입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이렇게 공허한 비엔날레가 반경 100킬로도 안 되는 도시들에서 동시에 중복 개최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국가건축정책위원회처럼 국가비엔날레정책위원회를 만들어서라도 이 거대한 낭비를 줄이고 내실을 다져야 할 때가 왔습니다.

이번 비엔날레 투어에서 흙속의 진주처럼 가능성을 발견한 곳도 있습니다. 대구사진비엔날레와 대전바이오비엔날레 그리고 금강자연비엔날레가 그렇습니다. 세 곳 모두 처음 가본 비엔날레였지만 지역공동체에 기반을 둔 내부기획자들의 열정과 연구가 전시로 이어진 작고 알찬 비엔날레들이었습니다. 사진의 도시 대구는 지역의 장점을 잘 살려 특화된 장르에 집중했고, 금강자연비엔날레는 자연을 무대로 인간과 예술을 잘 어울렀습니다. 특히 대전바이오비엔날레는 과학과 예술의 결합이라는 일관된 주제를 가지고, 첫 회부터 지금까지, 미술관 내부 큐레이터들과 카이스트 과학자들의 공동 연구 결과가 고스란히 반영된 전시였습니다. 그저 오브제를 나열해 놓은 것이 아니라, 오브제와 오브제, 오브제와 공간, 개별 오브제와 전체 주제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미술관 내부 큐레이터가 장기적으로 연구하고 지속적으로 전시를 기획하는 `in-house curating` 시스템의 장점은, 특히 대전처럼 특화된 분야와 주제를 다루는 곳에서는, 지난 비엔날레의 성과와 한계마저도 고스란히 이어 받아 더욱 깊이 있는 전시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패러슈트 큐레이터(낙하산 타고 뛰어 내린 외국인 큐레이터를 일컫는 말)나, 과학을 모르는 외부 큐레이터가 기획했다면 매번 같은 시행착오가 되풀이되고, 주제를 심화시키지도 못했을 겁니다. 이런 점에서 대전바이오비엔날레는 기존 비엔날레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서 매우 희망적입니다. 새로움은 끊임없이 과거를 사유하고 전복하고 재해석할 때에만 모습을 드러납니다. 한국의 다른 비엔날레들도 그렇기를 바랍니다. 윤재갑 상하이 하우아트미술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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