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마을 이름의 유래가 궁금했다. 외갓집은 `양새터골`에 있었고, 나는 흑석리 `물안`에서 살았다. 냇물이 휘돌아가는 곳이라서 `물안`은 그 유래를 짐작할만했으나 `흑석`이라는 지명은 낯설었다.

한자를 익히면서 흑석이 검은 돌을 뜻한다는 것을 알고 나니 그 이름이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냇가나 산기슭에서 일부러 검은 돌을 찾아다녔지만, 수정을 주운 적은 있어도 검은색 돌을 발견할 수 없었다. 나중에 흑석이란 이름이 거문고를 닮은 들인, `거문들`에서 유래한 지명이라는 것을 알고 무릎을 친 적이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창지개명으로 그 이름이 바뀐 것을 알고는 무척 화가 났다.

일본인들이 악의를 품고 편의를 내세우며 사람 이름뿐 아니라 고을과 동네 이름까지 고쳐, 군 97개, 면 1834개, 리와 동 3만 4233개의 우리말 이름이 사라졌다고 한다. 우리가 나고 자란 곳을 자연스럽게 부르는 이름이 사라지고 대신 일본인이 바꾼 지명을 그대로 쓰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아우내는 병천, 숲실은 임곡, 두물머리는 양수리, 햇살말은 양촌, 새말은 신촌 등등으로 일본인이 지명을 바꾸었다고 한다. 심지어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현장이었던 노근(老斤)리의 원래 이름은 녹은(鹿隱)리였다. `사슴이 숨어 있는` 마을이라는 평화로운 뜻의 조선말이 `녹슨 도끼`라는 흉한 일본식한자로 바뀌어서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는가 싶다.

이름을 공들여 짓고 뜻을 심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이다. 때마침 육근상 시인의 시집 `우술필담`이 출간돼 반갑다. 백제말로 `우슬`(우술)이라 불렀던 회덕 사람들이 자연과 함께 나눠온 정서와 애환을 감칠맛 나는 유역의 입말로 표현한 시집이 `우술필담`인데, 잃어버린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거기에 담긴 가치와 심정을 되찾으려는 시인의 간절한 뜻에 이야기의 재미까지 더해 많은 독자가 공감하고 있다. 가까운 곳을 무시하고 먼 곳만 그리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는 요즈음 시의 표현을 통해 되찾는 것은 우리 정서뿐 아니라 우리말, 우리 이름에 깃든 고유한 뜻과 얼이 아닐까. 권덕하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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