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켤레의 낡은 신발이 놓여있다. 막 벗어놓은 듯 신발 끈은 어지럽게 풀려 있고 한쪽 신발의 발목 부분은 부주의하게 접혀 있다. 헤지고 찌그러진 모양새가, 저택의 복도를 걸어 다니거나 마차에 올라 거리를 내려다보는 귀하신 분의 신발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 신발은 흙길이든 도시의 골목이든 건설의 현장이든 정신없이 걷고 또 걷는 이가 주인일 것이다. 다가가서 들여다보면 찌든 발 냄새가 날 것 같은 이 구두를 그린 화가는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이다.

반 고흐, 네덜란드의 화가, 해바라기와 사이프러스 나무와 별들이 소용돌이치는 밤하늘을 그렸던, 살아생전에는 절망과 불행으로 몸서리쳤고 자신의 귀를 자르는 기행을 저질렀으며 정신병원에 수용되었고 종국에는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

독실한 목사 집안에 태어난 반 고흐는 화가가 되기 전 선교사가 되고자 벨기에 보리나주(Borinage)로 가서 가난한 광부들과 농부들과 더불어 생활했다. 가진 돈과 좋은 옷을 모두 자신보다 가난한 이들의 손에 쥐어주고 겉옷과 양말도 없이 다녔을 뿐 아니라,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이들을 꺼려하지 않고 헌신적으로 돌보았던 반 고흐는, 그러나 어눌한 말주변과 과도한 종교적 열정(!)으로 인해 선교사 자격을 박탈당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 그가 그린 광부나 농부, 가난한 여인들의 초상화는 모두 어두운 배경으로 초라한 복색을 하고 있지만 어딘지 성인(聖人)들의 초상화 느낌을 자아낸다.

반 고흐의 낡은 구두 그림은 이 시기에 그린 가난한 이들의 초상화와 비슷한 색조, 비슷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컴컴한 갈색조로 그려진 한 켤레의 구두이지만, 단지 `더러운 구두 그림`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눈길을 끄는 데가 있는 것이다. 그가 그린 주름진 광부의 초상화가 무시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듯이, 그의 낡은 구두 그림은 신발의 주인을, 신발 주인의 고단했던 인생을 상상하게 한다. 그렇다면 이 구두의 주인은 누구일까.

이 구두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의문은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와 같은 철학자를 사로잡았다. 하이데거는 이 구두가 농부 여인의 것이라고 가정하고, 이 낡은 구두로부터 그 여인의 인생을 읽어냈다. 그는 구두 안쪽의 시커멓게 그려진 부분에서 들일을 하러 나선 이의 고통을, 구두의 실팍한 무게에서 넓게 펼쳐진 밭고랑을 천천히 걷는 강인함을, 그리고 구두창에서 그 아래에 서려 있는 해저물녘 들길의 고독을 보았다. 이 보잘 것 없는 구두에, 먹을 것을 벌기 위해 근심하고 고난을 극복하고 아이의 출산에 기뻐하고 죽음 앞에서 전율하는 삶의 문제들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반 고흐는 렘브란트 이후 자화상을 가장 많이 남긴 화가 중 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얼굴을 마치 지인(知人)처럼 잘 알고 있는데, 그것은 청아하고 푸른 불꽃에 휩싸인 그의 자화상으로부터 귀를 자르고 붕대를 맨 자화상에 이르기까지 그 자신이 그린 자화상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실로 이 그림 속의 신발은 단지 물건으로서의 구두가 아니라 삶의 궤적을 고스란히 담은 얼굴처럼 보인다. 헤진 표면은 세월에 거칠어진 피부처럼, 아무렇게나 흩어진 신발 끈은 다시는 팽팽하게 펴질 수 없는 주름처럼, 정돈되지 않은 신발의 목은 빗어 넘기지 않은 머리칼처럼, 세월을 살아낸 사람의 인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많은 사람들을 사랑했지만 사랑을 되돌려 받지 못했고, 수많은 그림을 그렸지만 인정받지 못했던 반 고흐의 고단했던 삶을 떠올리게 한다.

이 한 켤레의 낡은 신발이 농부 여인의 신발인지 반 고흐 자신의 신발인지 화가가 다시 살아나 이야기해 주기 전에는 확실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누구의 신발이었는지는 몰라도 이 작품이 전하는 바는 역사적 사실이나 논리가 아닌 가슴으로 전해진다. 이 작품을 바라보며 농부의 아내를, 반 고흐 자신을 떠올릴 수도 있고, 혹자는 아버지의 신발을 기억할 수도, 자신의 발에 신겨져 있는 신발을 내려다보게 될 수도 있겠으나, 이러한 다양한 연상들이 수렴되는 곳은 `세상을 걸으며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감상인 것이다. 이윤희 청주시립미술관 학예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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