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 운필(運筆) 수련 정도의 차이다. 운필의 원리를 모르면 아무리 좋은 먹을 갈아 써도 마찬가지다. 좋다는 송연묵(松烟墨)에 유연묵(油煙墨)을 섞는다 든지 현묵(玄墨)과 청묵(靑墨)을 함께 갈거나, 아니면 묽게 하는 실험을 해봐도 결과는 큰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이 난관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선뜻 시원한 답은 없다.
조선 후기 서화가인 이광사(李匡師)는 집필과 운필법을 보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나라 글씨는 붓을 잡는데 단점이 있어 종이가 붓 끝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흘낏 보기만 해도 먹의 밝고 어두움을 알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붓이 종이와 밀착되지 않고 미끄러짐을 안타까워 한 말로 붓이 종이 뒷면을 파고드는 듯 한 투과지배(透過紙背)의 중요성을 이른 셈이다. 이를 도장을 인주에 찍듯 하는 인인니(印印泥), 또는 쇠꼬챙이로 모래를 긋는 추획사(錐劃沙) 등으로도 표현한다. 이것은 붓과 종이가 밀착되지 않아 미끄러져 들뜸을 막을 수 있는 비법이다.
나도 이 문제를 풀기위해 무던히 노력하였다. 한 가지 터득한 점은 길고 부드러운 붓이 송곳처럼 지면을 파고들듯이 운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깨우침을 주변에 권해 보았지만 이해하는 듯 하지만 실천하지 못함을 보고 안타깝게 여기곤 하였다. 부드럽고 긴 붓을 곧추세우기 어려웠는지 다시 짧고 강한 붓을 잡는 경우를 더러 보았다. 하지만 이법을 숙지(熟知)하고 나면 어떤 종류의 붓이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운필법은 꼭 터득해야 한다. 물론 과정이 쉽지는 않다. 쉬우면 누구는 못하겠는가? 어려우니까 해결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먹빛은 달라진다. 그래서 옛 어른 들이 붓 세우기가 어렵다고 하였고, 붓을 세울 줄 알아야 글씨가 됨을 누누이 강조하였던 것이다.
다음은 점획과 포백(布白)이다. 점획의 굵기와 크기를 달리해서 단조로움을 면하고 골육의 균형을 맞춘 외강내유(外剛內柔)가 아닌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선질로 너그러운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먹 색과 글씨가 조화되면서 융화력이 생겨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기운이 생동하게 된다. 먹은 사려(思慮)의 깊이와 숙련 정도에 따라 한 색이 만 색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먹색은 현색(玄色)외에 청색(靑色) 또는 주색(朱色)도 있는데 왜 검은 색을 중시하는가? 노자는 "검고 또 검으니 모든 묘의 문이다(玄之又玄 衆妙之門)"라 했다. 왜 현이 중묘지문인가? `혼돈(混沌)`이기 때문이다. 도가(道家)에서는 혼돈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만물이 생성된다고 말한다. 이는 곧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듯 함 속에서 쉬지 않고 작용을 한다는 의미이다.
유가(儒家)에서도 형상이 없으나 도리(道理)인 이기(理氣)가 있어서 이들의 작용에 의해 만물을 생성하는 것을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라 한다. 아무 작용도 하지 않는 듯 하지만 만화(萬化)하는 현(玄)은 색 중에 으뜸이며 모든 색을 포용하기도 한다. 마치 바다는 온 만 가지가 다 들어와도 항상 거부함 없이 받아들이고 용해하여 쪽빛을 발하듯, 빨·주·노·초·파·남·보를 한 통에 넣고 뒤섞으면 현색이 된다. 먹으로 쓴 오래된 좋은 작품일수록 고색창연(古色蒼然)하다. 이것은 어디서 나오는가? 작가의 가슴에서 비롯된다.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함양(涵養)하여 맑은 먹빛을 발휘해 보자. 송종관 서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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