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귀하던 조선시대, 책은 곧 권력과 다름없었다. 수직적 계급 사회에서 책은 지식인들의 점유물이었고, 책을 공유하면 할수록 권력도 나누어진다고 믿었던 사회에서 책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주체는 극히 한정적이었다. 15세기 한글 창제 이후에도 한글 서적은 오직 번역본으로서의 역할만 했기에 민중들이 책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더욱 요원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국가나 지방관청에서 독점한 출판은 책을 너무도 비싼 무가지보(無價之寶)로 만들어버렸다.

1529년(중종 24년) 5월 25일에 대사간 어득강이 왕에게 서점 설치에 대해 아뢴 말을 요약하면, "학문에 뜻이 있는 유생도 책값이 없어서 책을 읽지 못하고, `대학`, `중용`과 같은 얇은 책도 상면포 3-4필은 줘야 살 수 있다"고 했다. 논 2-3마지기와 맞먹는 책값을 감당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현실은 책을 권력자의 전유물로 만들어버렸고, 지식과 정보의 공유로서의 유통과 보급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지면서 서점 설치의 필요성은 끊임없이 대두되었다. 중종 때부터 명종조까지 서점 설치에 대한 논의는 지속적인 논쟁거리였지만, 끝내 역사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말았다.

가을의 전령사인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선선한 가을밤에 운치를 더하면서 독서의 계절이 왔음을 알리고 있다. `한서`에 "귀뚜라미는 가을을 기다려 울고, 하루살이는 어두운 때에 나온다"했으며, `시경`에는 "시월에 귀뚜라미, 내 침상 밑으로 들어오네"라고도 했다. 가을만을 기다려온 귀뚜라미의 음악에 맞춰 책장을 넘긴다면 이보다 완벽한 하모니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책을 쌓아두기만 할 뿐, 책장을 넘기는 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책을 사서 보지는 않고 쌓아만 두는 일명 `츤도쿠(積ん讀)`들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읽다`와 `쌓다`가 합쳐져 `읽을거리를 쌓아 둔다`는 의미의 일본말이다. 독서의 행위보다 구매의 행위에만 방점이 찍혀 있는 듯하다. 일본 작가는 "책을 사는 것 자체가 지적 욕구를 뜻하며, 산 책을 보기만 해도 지적 자극이 되니, 츤도쿠를 잘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다. "읽을 책을 사는 게 아니고 산 책 중에 읽는 것"이라는 소설가의 말도 언뜻 이해는 된다. 모두 독서가 전제된 구매를 의미하므로 합리적 이해는 가능하지만, 무엇인가 부족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우리는 매일 정체도 알 수 없는 책들이 부지기수로 쏟아져 나오는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이제는 발품을 팔거나 책장을 넘기지 않아도 컴퓨터나 휴대전화로도 책을 접할 수 있다. 손가락 몇 개만 움직이면 제한된 공간에서도 얼마든지 무한의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세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다양한 책을 누구나 접한다는 공익(共益)의 측면도 있지만, 책을 사서 쌓아두기만 한다면 분명히 공해(公害)의 측면도 공존할 것이다. 책은 존재하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훌륭한 학자의 저서일지라도 일인 독자(?)에 지나지 않는다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저자의 사유를 독자가 다같이 공유하면서 이해하고 비평하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한사람이 백 권의 책을 가지고 있다고 책의 값어치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한 권의 책을 백사람이 읽어야 책은 출판된 소임을 다하는 것이다.

출판사나 서점 입장에서는 책이라도 사는 현실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기며 `츤도쿠 센세이(積讀 先生)`라도 감사하다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책은 `소장`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내 것으로 `소유`해 세상과 `소통`하는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다. 앞으로라도 책(Book)을 데코용으로 쌓아두기만(積) 하는 `북적북적(Book積Book積)`한 습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책 읽기에 시간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비록 시간이 있어도 책을 읽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지금 바로 책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책장을 펼쳐야 할 것이다.

김하윤(배재대학교 주시경교양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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