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진 시네마 수프] 라 멜로디

바이올린 연주자 시몽은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됩니다. 학년말에 다른 학교와 합동 오케스트라로 공연을 올려야 합니다. 오케스트라반 담당인 파리드 선생님은 무엇보다도 중간에 그만두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합니다. 그러나 6학년 아이들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무례하기까지 합니다.

연주자인 동료를 만난 시몽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어떠냐는 질문에 "기겁할 걸. 30초도 집중을 못하는 애들이야. 세헤라자드를 가르치래. 감방에서 림스키 코르사코프를 연주하겠지."라고 대답합니다. 그냥 일이 아니라 사회사업이라고 가르치는 일을 폄하하기까지 합니다.

오케스트라 공연을 해야 하는데 바이올린 잡는 법부터 가르쳐야 하는 수업에 첫날부터 깐죽대던 학생 사미르는 결국 시몽의 화를 돋우고 시몽은 사미르의 멱살을 잡아버립니다. 다음날 아침 사미르의 아버지가 찾아와 자기 아들을 때렸냐며 시몽의 멱살을 잡습니다.

모두를 안고 가다가는 다 망칠 거라며 문제아 사미르를 내보내려던 시몽은 깊은 생각 끝에 자신의 수업 방식을 바꾸기로 합니다. 아이들에게 연주의 재미를 찾을 수 있도록 유도하기 시작합니다. 사미르의 집을 찾아가 사미르의 부모에게 사미르가 오케스트라에서 빠지면 안 될 중요한 연주자라며 재 합류를 권고합니다.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른 학교 학생들과 합동 리허설에서 현저히 실력이 떨어지는 오합지졸의 연주를 선보인 아이들은 분하고 창피함에 몇몇은 울기까지 합니다. 자신들의 형편없는 실력을 실감한 아이들은, 그중 남다른 재능을 보이던 아놀드가 연습하는 옥상으로 새벽부터 모여 집중 연습을 시작합니다.

연주자로서 중요한 순회공연 제안을 받은 시몽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계속 해야 할지를 고민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현악 4중주 콘서트에 제자 아놀드와 사미르를 초대합니다. 공연이 끝나고 귀가한 시몽에게 노파인 시몽의 어머니는 공연이 어땠는지 묻습니다. 시몽은 관객도 많고 연주도 훌륭했고 반응도 좋았지만 자신은 즐겁지가 않았다고 말합니다. 바이올린을 케이스에 넣고 집에 돌아왔는데 그게 다였다고, 그리고 요즘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그게 훨씬 즐겁다고 말합니다. 결국 아이들을 위해 순회공연을 포기하기로 결심한 시몽은 아놀드를 만나 자신의 딸이 어렸을 때 쓰던 바이올린을 주며 격려합니다.

그러나 전기 누선으로 연습실에 화재가 나고 학교 측은 다른 연습실을 제공할 여력이 없다고 합니다. 무산된 공연 연습에 눈물을 보이는 아이들. 시몽은 학부모들을 일일이 찾아다닙니다. 음식점을 운영하고, 자동차를 고치고, 전기공인 부모들이 의기투합해 빈 창고를 고쳐 연습실을 만듭니다. 덕분에 아이들은 다시 연습할 수 있게 되고 학부모들은 함께 모여 아이들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우게 됩니다.

드디어 발표회 날. 아놀드의 멋진 솔로연주와 오케스트라의 안정적인 연주로 관객들의 환호 속에 무사히 공연을 마치며 영화는 끝납니다. 그리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 연주는 아이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되었을까? 아놀드는 전문 연주가가 될 수 있을까?

인지심리학자이자 예술가이며 교육자인 제시카 호프만 데이비스는 자신의 저서 `왜 학교는 예술이 필요한가`를 통해 예술학습이 수학, 읽기와 쓰기 성적을 향상시키고 학생들의 지능지수와 대학 입학 자격시험 점수를 올리는 데 기여했다고 인정받은 연구들을 통해 예술 교육에 대한 옹호적 입장을 보이는 것을 그만 둬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술은 예술 그 자체로 가르쳐야 하며, 더 나아가 예술이 교육의 전면과 중심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정보를 가지고 무엇을 하는가가 힘인 시대에, 무엇하러 이 세상이 단편적인 정보들에 의해 강화된다고 생각하도록 학생들을 오도해야 하는가? 학생들이 어떻게 숫자들의 한계를 넘어서 보는지가 중요할 때에 우리가 왜 정답과 오답의 개수를 세면서 점수에 그토록 집중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창의성을 위한 예술 교육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데이비스는 예술 학습의 결과는 자신에 대한 이해, 상상력, 표현, 공감, 감정에 대한 주목, 해석, 존중, 모호성의 이해, 탐구, 지향, 참여, 책임의 소양을 배우게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교육이 성취해야할 상당히 본질적이면서도 상위개념의 소양입니다. 물론 이를 위해 시험 학습의 증거와 근거를 찾으려는 것은 그만 두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만 각자의 학생들이 얼마나 자신의 창작 활동을 진행 시켰는지, 각자의 작품 안에서 성취하려는 목표점에 도달하였는지를 평가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변에 자녀를 초등학교에 보낸 학부모들은 자신이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과 크게 변화 없는 학교 커리큘럼에 놀란다고 합니다. 자녀를 중학교에 진학시킨 부모들은 중학교 철저한 내신 관리 없이 특목고를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좌절한다고 합니다. 학부모들의 교육관, 인생관과 너무나 부딪히는 교육현실에 자괴감에 빠지면서도 어쩔 수 없이 아이에게 내신 관리를 요구하고 선행학습의 필요를 뼈저리게 느낀다고 합니다. 여유가 있다면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 외국인 학교나 조기 유학을 선택했을 거라고 합니다.

유능하고 탁월한 학생들일수록 더욱 집중적으로 근육을 키우듯 이미 만들어진 문제를 정확하고 빠르게 푸는 연습을 무한반복 시키며 입시 기계로 길러내는 교육.

데이비스는 묻습니다. 합리적인 지식을 넘어서 비합리적인 가능성을 볼 수 없다면, 그리고 시각적인 단서들의 한계를 부수고 나아가 지식의 토대를 수용할 수 없다면 우리의 앎은 얼마나 활기가 없고 우리의 시야는 얼마나 제한적일지 말입니다.

그것이 반드시 예술교육을 통한 것일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교육의 본질적인 목표와 의미에 다가가려는 교육의 혁신이 간절합니다. 이현진 미디어영상제작학과 교수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