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면 작가 지망생들의 마음은 분주해진다. 각종 신문이나 문예지들의 현상공모가 가을에 많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신춘문예 작품 모집은 일반적으로 11월 초에 공고를 하고 11월 말이나 12월 초에 마감을 한다. 당선자와 작품은 보통 새해 1월 1일자에 발표한다. 주요 문예지 관계자들도 가을이 되면 신문사들과 비슷한 이유로 바쁘게 움직인다. 가을은 작가 지망생들이 새로운 꿈을 꾸는 계절이다.

등단 제도는 우리나라 현대 문학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왔다. 등단 제도의 꽃으로 불리는 신춘문예는 1914년 말 일제 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에서 `신년 문예모집` 공고를 내면서 시작되었다. 이듬해인 1915년에 첫 당선자가 나온 이후 신춘문예는 다른 신문들로 확대되어 나갔다. 1925년 동아일보, 1928년 조선일보가 작품 공모를 시작하면서 `신춘문예`가 등단 제도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현재 신춘문예를 시행하는 신문사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한국일보, 경향신문, 문화일보, 세계일보, 서울신문, 부산일보, 대전일보 등이다. 다만 한겨레신문은 시행하고 있지 않다.

문예지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양적 풍요에 비해 일반 독자들의 관심은 미흡한 상황이지만, 종합문예지를 비롯해 장르별 전문 문예지들이 꾸준히 발간되고 있다. 그 수준도 천차만별이어서 고급의 전문적인 문예지도 있지만, 아마추어 문학 애호가들의 동인지의 성격을 띤 것들도 적지 않다. 그리고 이들을 대개 신인을 발굴한다는 명목으로 등단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현재 수백 종의 문예지와 일간지들이 한 해에 적어도 수백여 명, 아니 그 이상의 새로운 시인이나 소설가, 수필가가 등단을 하고 있다. 등단 공화국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해마다, 계절마다 많은 사람들이 작가로서 새 출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전 세계의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현상이다.

그러나 과유불급이라 할까, 지나치게 많은 문인들이 새롭게 등장을 하면서 우리나라 문학장은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물론 등단 제도가 우리 문학에 끼치는 긍정적인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문학의 저변 확대라든지 문단의 활성화 측면에서는 고무적인 측면이 없지 않다. 문제는 그런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더 많다는 점이다.

등단 제도와 연관된 문제는 이렇다. 첫째, 엄정한 심사 없이 등단을 남발하여 저급한 수준의 작가를 양산한다. 둘째, `신춘문예용 혹은 문예지용이 따로 있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작품의 몰개성화를 유발한다. 셋째, 등단한 작가들만이 문학 활동을 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규율로 인하여 폐쇄적인 문단 구조를 형성한다. 넷째, 매체나 심사자를 중심으로 하는 문학 권력을 형성하여 문학장의 공정성을 저해한다. 다섯째, 신문사가 문예지의 상업성이나 이념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다. 여섯째, 모든 분야에서 경력보다 능력을 중시하고 경계를 해체하는 시대적 흐름과 충돌한다.

우리나라 등단 제도는 국제적 트렌드와도 어울리지 않는다. 서구 유럽이나 미국 등 주요 선진국들에서 우리나라처럼 등단 제도를 운영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우리에게 등단 제도를 전해준 일본에서도 등단 제도는 거의 무용지물이 되었다. 오늘날 서구 선진국에서는 등단 문제를 출판 시장에 맡겨두는 게 일반적이다. 출판사 편집자가 좋은 작가를 발굴하여 출판 시장에 내놓음으로써 자연스럽게 등단도 하고 작품에 대한 평가도 받는다. 이는 제도라는 외형보다는 작품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반영한 시스템이다.

이제 우리나라도 등단 제도가 정말로 필요한지 심각하게 고민할 때가 되었다. 기성 작가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바탕으로 작가 지망생들에게 선착순 릴레이처럼 경쟁을 시키는 것이 과연 그들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한 일인가? 경쟁을 한다면 오직 작품을 가지고 문단이나 출판 시장에서 해야 하지 않을까? 등단 과정이나 화려한 등단 이력 때문에 오히려 작품 진화에 소홀해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시대가 변했으니 낡은 등단 제도를 넘어서는 것이 진정 문학을 위한 길이 아닐까 싶다.

이형권(충남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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