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원로예술인을 만나다 3.조광자 무용가

지난 18일 대전 대흥동에 있는 춤사랑연구회에서 인터뷰를 진행중인 조광자 무용가 / 사진=원세연 기자
지난 18일 대전 대흥동에 있는 춤사랑연구회에서 인터뷰를 진행중인 조광자 무용가 / 사진=원세연 기자
"우리 춤의 오묘한 맛과 향기는 마음을 즐겁게도 하고, 때로는 슬프게도 합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삶, 외길은 외롭고 고달픕니다. 일흔을 넘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춤, 여생을 춤과 함께 더불어 가고 싶습니다. 짐승은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기는 것입니다. 추억을 뒤돌아볼 수 있는 기회는 아무에게나 오지 않습니다."

18일 만난 조광자 무용가는 일평생 무용과 춤, 문화 발전에 기여한 원로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열정으로 가득 찬 모습이었다. 그는 인터뷰 내내 한편에 쌓아 놓은 책과 자료들을 들추고 이제는 가물가물한 기억들을 복기하며 여전히 식지 않은 예술에 대한 열정을 드러냈다.

조광자 무용가가 춤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유년시절 그의 생활환경과 밀접히 연관돼 있다.

1945년 대전 대흥동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춤과 함께 자랐다. 장날이면 대전역 앞에는 장사꾼들이 장사진을 쳤고 엿장수와 약장수 등이 흥을 돋우는 춤판을 벌이기라도 하면 이내 조광자 무용가의 마음에도 흥이 차올랐다.

그는 초등학생 때 학예회 무대에 선 것을 시작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꾸준히 무용의 길을 걸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할 수도 있었지만 그의 선택은 이미라 무용가의 제자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스승 이미라 무용가에게 역사의 춤을 배워 1965년 시인예술경연대회 무용 부문에 나가서 입상하는 등 조광자 무용가는 이미라 무용가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늘 "재능이 보인다. 열심해 해봐라"라며 격려를 해줬다.

이후 그는 1969년 대전 원동에 `조광자 무용연구소`를 열면서 제자 배출에 주력했다. 당시 훌륭한 무용가를 양성하기 위한 그의 열정은 실로 대단했다. 특히 그는 집이 가난해 무용을 배울 수 없는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쳤다. 이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그의 아버지는 장사를 도울 점원을 고용할 때 항상 가정 형편이 어렵지만 교육에 열의가 있는 사람을 고용했다고 한다. 이후 점원을 학교에 보내주며 장사와 교육을 함께 시켜줬던 아버지의 영향이 훗날 조광자 무용가에게도 긍정적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는 이화여대 평생교육원에서 한국무용을 수료했고, 학생들에게 무용, 발레, 한국의 전통 춤, 농악 등 광범위한 예술 분야에서 교육에 종사했다. 시민대학에서 12년가량 무용교육을 해오며 어른들도 가르쳤다. 유년시절 양질의 교육을 받지 못한 어른들의 갈증을 잘 알기에 교육을 통해 풀어주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이외에도 웃다리 농악 중악종악회장을 지냈고, 대전무용협회장을 역임했다. 제5회 신인 예술콩쿠르 무용부문 신인예술상을 수상한 그는 대전시문화상, 법무부장관 표창 등 상 다수를 받았다.

여러 예술 분야를 두루 섭렵하다 보니 그에게 예술의 경계는 무의미하다. 모든 예술은 상호 접목할 수 있는 융합의 대상이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그의 유연한 사고를 엿볼 수 있다.

조광자 무용가는 대전의 민속예술과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도 커서 대전 곳곳을 누비며 발굴에 앞장선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나라의 번영을 위한 제인 `연화부수제`도 조광자 무용가의 노력이 아니었으면 말없이 사라질 뻔했다. 연화부수제는 1996년 조광자 무용가의 손에서 다시 태어났다.

여전히 에너지가 넘치는 조광자 무용가는 늘 춤이 보약이라고 말한다. 춤을 추다보면 몸과 마음의 건강 모두를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항상 춤을 전파하고 문화예술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데 시간과 열정을 쏟는 그의 행보는 보는 이에게 늘 보약이 된다. 원세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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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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