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낮 열 두 시부터 오후 세 시까지 온 땅에 어둠이 덮여 있었다는 말로 시작된다. 오후 세 시에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로 부르짖으신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어떤 이들은 ‘침묵의 하느님’이라고 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마음에 드는 아들의 죽음 앞에서 침묵하지 않으셨다. 하느님께서는 역설적인 어둠과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지는 사건을 통해서 당신을 드러내셨다. 오직 대사제만이 일 년에 한 번 들어갈 수 있었던 성전의 가장 거룩한 곳인 지성소 휘장이 두 갈래로 찢어졌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당신 자신을 모든 이에게 온전히 들어내셨음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상 죽음은 하느님의 온전한 자기 계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부르짖으시자 곁에 서 있던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 “저것 봐! 엘리야를 부르네.” 하느님의 최종적이며 온전한 자기 계시 사건 앞에서도 사람들의 몰이해가 들어난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은 해면을 신 포도주에 적신 다음 갈대에 꽂아 예수님께 마시라고 갖다 대며 조롱하기도 한다. 역설적으로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려 온 그들이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며 조롱한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은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시고 조롱받으신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첫 부르짖음과 마지막 부르짖음은 하느님께 대한 원망이나 고통의 외침이 아니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 앞에서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를 잃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시편 22장을 노래하셨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고 시작된 시편 22장의 주요 내용은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의탁이다. 이 시편은 “당신께서 저에게 대답해 주셨습니다.”(22절)라고 말하며 주님을 찬양하라고 끝맺는다(23~24, 26~27절). 하느님과 그분의 활동 방식은 온전한 신뢰와 의탁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을 마주 보고 서 있던 이방인이었던 백인대장이 모순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말은 마르코 복음에 총 세 번 나오는데, 먼저 복음의 처음에 나온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성경에서 ‘하느님의 아들’은 하느님께 특별한 사명을 받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이다. 복음은 예수님의 삶을 통해 하느님의 뜻이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보여 줄 것이라고 먼저 말해둔 것이다.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말이 다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하고 소리 질렀다.”(마르 3,11)라는 구절에서이다. 그러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능력 있고, 강해지고, 위대해질 수 있는 모든 기회들을 거부하셨음을 알 수 있다.(마르 7,36. 8,30. 9,9) 오히려 아버지와 하나이셨던(요한 10,30) 예수님의 영광과 권능은 그분의 전 삶을 감싸고 있는 감싸고 있는 하나의 사건, 즉 그분의 비천한 탄생과 비참한 죽음에서 드러난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우리의 거룩함과 위대함이 들어나는 때도 위대해지고 강해지는 때가 아니다. 오히려 구유와 십자가 위의 예수님처럼 자신을 ‘파괴하고, 헛되게 하고, 의미가 없어지게’(κενοσις) 할 때이다. 예수님의 삶은 죽음과 부활, 죽음과 생명을 다른 두 가지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으로 보라는 강력한 충고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전 삶 안에서 이미 함께 존재하였던 죽음과 부활을 같은 사건으로 볼 때 하느님과 그분의 활동 방식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질 수 있고, 나와 나의 삶에 대해서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간 첫날 저녁에 제자들이 유다인들이 두려워 모두 잠가 놓은 문을 뚫고 가운데에 서시며 말씀하신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한 주가 시작되는 때에 새로운 구원 역사를 시작하시며 ‘평화’를 선포하신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예수님의 두 손과 옆구리는 십자가상의 죽음에 대한 기억을 담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두 손과 옆구리는 실패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평화를 방해하는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를 의미한다. 이렇게 평화를 방해하는 죄와 죽음에 대한 온전한 승리인 구원은 자기 죽음인 십자가를 통해서 왔다. 예수님께서 다시 평화를 선포하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의탁 안에서,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능력으로 그분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우리의 삶 안에서 재현해 내야한다. 오창호 천주교 대전교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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