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해한 메세지와 아쉬운 연출

세상 모든 남자들이 갈망한 만큼 빼어난 외모를 지닌 `나스타샤`가 두 남성에게 청혼을 받는다. 돈으로 사랑을 쟁취하려는 사업가 `로고진`과 가진 것은 없지만 순수하고 선한 `미쉬킨 공작`. 나스타샤는 자신의 삶을 죄고 있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지만, 결국 로고진을 선택하며 파국을 맞는다.

대전예술의전당이 지난 7일부터 15일까지 세계 명작 연극을 자체 제작해 선보인 연극 `백치(연출 박정희)`는 19세기 러시아 문호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백치`가 원작이다. 간질 치료를 위해 스위스에서 요양생활을 마치고 러시아로 돌아온 미쉬킨 공작이 나스타샤와 만나 사랑에 빠지고, 질투심에 눈이 먼 로고진이 나스타샤를 살해한다는게 큰 뼈대다.

줄거리는 간략하지만, 이를 풀어내는 방식은 복잡다단하다.

소설 원작이 미쉬킨을 중심으로 전개됐다면 연극에서는 네명의 남녀를 중심으로 서사가 흘러가 인물의 감정선을 따라가기가 버거웠다. 무대 전체를 의자와 테이블로만 배치하고, 시간의 흐름과 장면 전환을 인물들이 의자와 테이블 사이를 오가도록 동선을 구성한 것 역시 분위기를 환기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와 같이 선한 존재인 미쉬킨이란 인물에 대한 공감이 서질 않다보니 미쉬킨을 통해 인간의 어두움을 드러내 인간의 본질을 되짚어보겠다는 연출자의 의도를 따라가기도 쉽지 않았다. 오히려 미쉬킨보다는 현실에 더 근접해 있는 로고진이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

관객이 무언가를 느끼고 공감하기에는 메시지가 다소 난해하고, 정리가 덜 된 듯 했지만 배우들의 열연과 감각적인 의상, 과하지 않은 음악은 박수를 받기에 충분했다.

특히 어린아이아 같은 천진난만한 미소와 목소리, 사지를 떨며 간질 발작을 일으키는 연기를 선보인 이필모(미쉬킨 역)는 자신의 할 몫을 충분히 해 냈다. 여러 남자들을 가지고 노는 요염한 매력을 발산한 황선화(나스타샤 역)도 지칠 줄 모르는 무대 위 열정을 불살라 대전 관객들의 눈에 확실한 도장을 찍었다. 로고진 역을 맡은 배우 김수현은 부친상의 슬픔에도 전혀 내색없이 역에 몰입하며 진정한 프로의 면모를 내보였다.

2시 30분이라는 다소 긴 시간과 고전은 어렵고 재미없을 것이라는 선입견으로 모두가 꺼리는 이때, 1000여쪽에 달하는 소설을 69쪽 분량의 대본으로 각색하고, 무대에 올린 것 만으로도 의미는 있다. 여기에 책장 어딘가에 꽂혀있을지 모르는 도스토옙스키의 고전을 다시 꺼내 읽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한건 이 연극이 가진 힘이다.

원세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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