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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3·1운동 100주년] 날선 총칼도 가마니 장터 함성은 덮지 못했다

2018-09-12기사 편집 2018-09-12 14:08:53

대전일보 > 기획 > 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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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 독립운동 유적지를 가다] ② 대전 인동장터

첨부사진11919년 3월 16일 독립만세운동이 펼쳐졌던 인동시장 모습. 사진=대전 동구 제공
인동을 포함한 대전 3·1운동은 반외세적 항일 정신을 계승한 인사들과 일제의 경제적 침탈 과정에 고통을 받던 상인들이 주도하고 절대 다수 농민들의 적극적인 참여 아래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이었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2-30대의 젊은 청년층 중심으로 추진된 독립운동이었으며 평화적으로 독립만세를 부르면서도 일제의 강력한 제지에 대해 과감히 맞서는 자세를 잃지 않고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이었다.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을 시작으로 서울을 비롯 도시와 시골 각지에서 울려 퍼진 독립만세의 물결이 전국으로 이어졌다.

대전 3·1운동은 서울 3·1운동 주도 세력과 직접 연결되지 않았다. 그러나 인종익과 김병수가 독립선언서를 전주와 청주 및 군산 지역에 배포하기 위해 대전을 경유했다. 충남 출신의 인종익은 일찍이 손병휘 휘하의 박덕칠 부대에 가입해 동학 활동을 전개한 인물이다. 그는 천도교 보성사의 간사로 이종일 과장으로부터 독립선언서 2000매를 전주와 청주 지역에 전달하도록 부탁받고 2월 28일에 대전에서 1박하고 전주에 가서 1700매를 교부했다. 인종익이 대전에서 투숙한 장소는 인동 시장의 주막으로 보인다. 당시 이들 두 인사와 접촉을 한 인사나 대전에서 이들의 구체적 활동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전국으로 퍼진 3·1운동의 기운은 대전에서도 활발히 진행 중이었다.



△나무꾼들이 독립만세운동을 외치다=인동시장은 대전의 대표적인 3·1 운동 만세시위지로 3월 3일부터 4월 초까지 4회에 걸쳐 만세 시위가 전개됐다. 이 만세 시위로 많은 인사들이 순국하고 부상당하고 옥고를 치렀다.

3월 3일 인동 나무장터에서는 나무꾼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는데, 다음달 4일 '동경 조일신문의 경성 특파원' 3일발 속보에 의하면 "인산에 대비해 전국의 헌병을 서울에 소집해 각 지방의 소요진압에 심한 곤란을 가져왔다"고 보도하고 "대전·평양·황주·창원·전남포·원산 등에서 폭민이 봉기해 돌을 던지는 소요가 있었다"고 보도했다. 두 자료 이외에 다른 자료나 기록들은 발견되지 않고 있어 구체적인 내용은 파악하기 어렵지만 독립만세를 위한 시도가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12일에는 천도교가 주동이 돼 남부교회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등 점차 그 기운이 무르익었다.

대전 인동장터에서는 3월 16일과 27일 그리고 4월 1일의 3차에 걸쳐 각각 주도 세력이 다른 인사들에 의해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됐다.

대전은 1일과 6일에 장이 열리는데 인동장은 가마니 시장으로 유명했다. 대전의 본격적인 만세시위는 이 인동 가마니 시장에서 3월 16일 장날에 일제 탄압에 분노한 나무꾼들에 의해 터지게 됐다.

대전 최초의 독립만세운동은 양사길에 의해 전개됐는데, 양사길은 산내면 장척리의 중농 집안에서 태어나 동회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15세 때는 송애서원에서 후술할 삼괴리의 김직원과 함께 공부했다. 그는 김용원의 안내로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서울의 휘문의숙에 입학하기 위해 상경했지만 여의치 않아 다시 귀향했다. 고향인 대전에서 한학을 익히며 식견을 넓히고 친구들과 교류했다. 그는 이후 경부선 철도 개설 보상 투쟁과 국채보상운동 등에 참가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1919년 고종이 승하한 후 식장산 아래에 망배단을 쌓고 송창록, 이돈직, 박종병, 김직원 등과 함께 예를 올렸다.

3월 9일 그는 이돈직, 박종병, 김직원, 김창규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계획을 세우고 역할 분담과 장소, 날짜를 협의했다. 양사길은 재정과 연락을 담당하고 일시는 3월 16일 인동 장날로 정했다. 그는 다른 이들을 시켜 서울에 가서 독립선언문과 독립신문, 국민회보, 직접 손으로 만든 태극기 등 300매를 조달토록 했다. 또 3월 12일에는 회덕 역전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열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군중에 배포하고 계족산 능선을 따라 삼괴리로 피신했다.

16일, 양사길은 삼괴리 주민 20여 명과 장척리 주민 8명, 낭월리 주민 10여명과 함께 지게에 땔나무와 가마니 등을 지고 인동 시장으로 나갔다. 그는 정오 무렵에 가마니 더미 위에 올라서서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장운심 등이 태극기를 나누어 주면서 행진 대열을 정비하고 만세 시위를 주도하자 부근의 장의 군중들이 합세했다.

이들 만세 군중들의 시위는 인동 일대 분만 아니라 경찰서가 있는 원동 일대로 확산돼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오후가 지나자 용두동(옛 대전MBC 자리)에 있는 헌병대와 문화동(옛 한국은행 대전지점과 삼일아파트 일대)에 있는 보병대가 출동해 무차별 총격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양사길이 쓰러졌고 그의 시체엔 가마니가 덮여졌다.

시위 진압대는 가마니 공판장에 있는 잉크를 도망가는 군중들의 흰 옷에 마구 뿌려 그 잉크가 묻은 사람은 무조건 총살했다. 이날 결국 15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했으며 9명이 체포됐다.

김창규 등 11명이 재판에 회부돼 8월에서 1년 6월의 옥고를 겪었다.

인동시장에서 두 번째 대규모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된 것은 27일 김창규 등 상인들의 주도 아래 전개됐다.

이 만세운동을 위한 계획과 준비는 3월 15일부터 추진된다. 김정철은 휘문의숙에 재학하던 중에 3·1운동이 일어나 독립선언서 등 유인물을 입수해 대전 삼괴리(산내)로 귀향했다. 그는 산내면사무소에서 이를 비밀리에 인쇄했다. 그리고 평소 알고 지내던 김창규에게 "3월 초 이후 각지에서는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있는데 대전에서는 그러하지 못함은 우리 조선인으로서 부끄러운 일인 즉, 당신은 대전 장날을 이용해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도록 하자"고 제안해 동의를 얻고 그에게 독립선언서, 국민회보, 독립신문 등 약 300매를 건넸다.

김창규는 이 유인물을 보관하고 있다가 27일 본정 2정목의 음식점에서 다수의 대전면민과 함께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를 것을 합의했다. 이들은 오후 3시경 시장으로 가 김창규가 "조선은 독립돼 전국 각처에서 모두 만세를 부르고 있는 이때 유독 대전만이 빠지고 있음은 큰 치욕이 아니냐"고 연설을 했다. 김완수 등은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주고 독립선언서와 국민회보 및 독립신문을 돌리면서 앞장서서 만세를 부르며 행진했다. 그러나 이 만세운동도 오래 가진 못했다. 일제의 헌병과 병력이 총출동해 오후 5시에 강제로 해산됐다.

4월 1일 인동시장에서 세 번째 대규모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됐다. 김직원과 박종병의 주도였다.

김직원과 박종병은 '조선이 독립된다'는 신념을 갖고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인동시장이 장을 여는 시간을 이용해 실행에 옮겼다.

이들은 김직원이 사전에 만든 태극기를 시장 군중에게 나눠주었다. 김직원이 태극기를 흔들면서 10여 차례 만세를 선창하자, 400여 명의 군중들이 이에 호응해 독립만세를 불렀다. 독립만세운동의 소식지를 접하고 출동한 일제 병력의 강력한 무력 진압에 의해 사상자가 발생했고 주도 인사들이 체포돼 만세를 부르던 군중은 해산했다.

일제는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표면적인 온건 정책을 바꿔 무력에 의한 강압적 수단을 이용한 진압 정책에 나서겠다고 공식화했다.

대전 인동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잇따라 열리자 일제는 대전에 80연대 소속 1개 중대를 주둔시켰다.

일제는 대전에 치안 기관인 헌병과 경찰, 보병을 이용해 처음부터 철저한 무력 강경 진압에 나섰다. 특히 보병 80연대 3대대는 독립만세를 부르는 비무장의 군중들에게 무차별적인 사격을 가했다.

일제는 3월 16일 인동에 헌병대와 보병대를 출동ㅇ시켜 무력 진압을 하면서 양사길 등 15명을 사살하고 수십 명을 부상시켯으며 9명을 체포했다. 27일에도 수십 명을 체포한 데 이어 4월 1일엔 헌병대 진압 뿐 아니라 보병 80연대 3대대 1개 소대가 본정 1정목(현 원동) 소재 대전소학교 근처에 매복했다가 만세를 부르는 군중에게 무차별 사격을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15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했다.

이후 일제는 유성 대전 헌병 분대를 유성에 출동시켜 주요 인사 8명을 체포했다. 31일 유성에서 군중들이 수비대에 투석으로 저항하자 무력으로 진압해 4명이 부상당하고 1명이 체포됐다.



△준비된 독립운동 '인동 시장 만세운동'=인동의 3·1운동은 사전에 준비된 독립만세운동이었다. 만세운동의 주도 인사들은 사전에 태극기를 미리 제작하고 독립선언서, 국민회보, 독립신문과 같은 유인물을 준비해 독립만세운동 현장에서 군중들에게 배포해 독립만세 고창을 북돋았다. 특히 태극기는 그 상징성으로 인해 독립만세를 부르는 군중들에게 힘찬 활력을 불어넣었다.

인동의 3·1운동은 상인과 유학자들이 주도한 독립만세운동이었다. 다른 지역과 달리 종교계와 학생들의 활동은 미약했다. 대전지역의 19회에 걸친 독립만세운동에서 그 주도 인사들이 확연히 드러나는 것은 일제 측의 재판 기록 뿐이기 때문에 전체적인 파악은 어려운 실정이다. 재판 기록에 나타난 주도 인사들을 살펴보면 3월 27일 인동시장에서 주도한 인사들 중에 상업에 종사한 인사는 김창규, 조상련, 윤명화, 김환수, 소홍규 등 어물상 5명, 박종호 등 잡화상 1명, 김성현 등 미곡상 1명으로 모두 7명에 불고했다. 이들은 전통적 업종에 종사하는 상인들이었다.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 체제 아래에서 신흥 도시로 성장한 대전은 일본인과 일본 상인들의 침투 대상이 됐다. 따라서 이들 인사들은 일본 상인과 그들의 상업 기술 침략으로 직접적인 피해를 본 장본인으로 반일 감정이 더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이 만세운동에 적극적일 수 밖에 없었던 요인 중 하나다. 당시 유림들은 직업 분류에서 구분되지 않은 것은 그들이 대개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농민들 가운데 일부는 유림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예를 들면 산내의 김정철과 김직원은 전통적 유학을 배운 인사들로 보이며 유학자들도 독립만세운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했다.



△'그 날의 함성 되새기자' 독립만세운동 재연행사 = 2000년부터 매월 3월 16일 인동 쌀시장 앞 도로(전기안전공사 옆)에서는 독립만세운동 재연 행사가 열린다.

옛날 대전의 가마니장터로 알려진 인동시장에서 독립을 위해 일제에 항거한 3·16운동의 숭고한 의미를 되새겨보고, 구민의 애향심과 자긍심을 높이기 위한 것으로 만세운동 재연행사는 시장을 가득 채운 태극기의 물결 가운데 행사는 당시 만세운동 상황을 재연한 가두행진으로 시작한다. 주민·학생·단체 등 모든 시민들이 태극기를 휘두르며 행진에 참여해 행사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이어 3.1절 노래 합창, 기미 독립선언문 낭독, 만세삼창으로 다함께 3·16 만세운동의 큰 뜻을 기린 후, 전문 공연단의 마당극이 이어진다.

친일파의 행적 풍자, 명성황후 시해 사건 등과 일본의 혹독한 압제, 학살 및 이를 굴하지 않는 민족의 결연한 의지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와 함께 독립운동 사진 자료 등을 전시해 조상들의 조국애를 기리고 독립운동의 의미를 되짚어 보는 데 기여하고 있다. 강은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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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사진21919년 3월 16일 독립만세운동이 펼쳐졌던 인동시장 모습. 사진=대전 동구 제공
첨부사진31919년 3월 16일 독립만세운동이 펼쳐졌던 인동시장 모습. 사진=대전 동구 제공
첨부사진41919년 3월 16일 독립만세운동이 펼쳐졌던 인동시장 모습. 사진=대전 동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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