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옛날 친구인 억새와 달뿌리풀, 갈대 셋이 살기 좋은 곳을 찾아 길을 떠났다. 서로 춤을 추며 가다보니 어느새 산마루. 산마루에는 바람이 세어 달뿌리풀과 갈대는 서 있기도 힘겨웠지만 잎이 뿌리쪽에 나 있는 억새는 견딜 만했다.

억새는 "와, 시원하고 경치가 좋네. 사방이 탁 트여 한눈에 보이니 난 여기 살래"하면서 그 곳에 자리를 잡았다.

달뿌리풀과 갈대는 "우린 추워서 산 위는 싫어. 낮은 곳으로 갈 테야" 하고는 억새와 헤어져 산 아래로 내려가다 개울을 만났다.

때마침 물 위에 비친 달에 반한 달뿌리풀은 "난 여기가 좋아. 여기서 달그림자를 보면서 살 거야"하고 그 곳에 뿌리를 내렸다.

갈대가 개울가를 둘러보더니, 둘이 살기엔 좁다며 달뿌리풀과 작별하고 더 아래쪽으로 내려가는데, 그만 바다에 막혀 더 갈 수 없게 되자 갈대는 강가에 자리 잡았다.

억새는 강인함의 상징이다. 그 어떤 농작물이나 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거친 곳에서도 억새는 뿌리는 내리고 잘 자란다. 제주의 중산간 어디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억새는 척박한 제주의 상징이다.

가을이면 제주의 산야는 억새의 은빛물결로 장관을 이룬다.

제주를 은빛으로 물들인 억새의 물결을 보기 위해 많은 관광객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111년 만에 기록적인 무더위를 기록했던 더위가 물러가고 이제 가을이다. 이 가을 억새의 은빛물결에 무더위에 지친 심신을 맡겨 재충전하는 것도 좋을 듯싶다.

가을 억새구경하기 좋은 몇 곳을 소개한다.

▲새별오름=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대표적인 억새 명소다. 물론 입장료는 없다. 대한민국 대표축제인 제주들불축제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겨울에서 봄으로 이어기는 길목에서는 오름 전면에 들불을 놓아 새해의 풍년과 풍요를 기원하는 새별오름, 가을이면 산체 전면이 은빛 물결로 일렁이며 장관을 연출한다.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잇는 평화로 인근에 위치해 있어 그 어느 곳에서도 차량과 대중교통을 이용해 쉽게 찾을 수 있다.

도로에서 보는 오름 전체를 뒤덮은 은빛 억새와 유연한 능선과 파란 가을 하늘,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어른 키보다 큰 억새 숲 사이로 탐방로가 잘 조성돼 있어 남녀노소 어렵지 않게 정상에 오를 수 있다. 등산에서 하산까지의 시간은 1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다.

정상에 서 있으면 마치 은빛 바다 위에 떠 있는 느낌이다. 그리고 멀리 한라산을 비롯해 주변의 많은 오름과 비양도, 차귀도, 제주바다까지 한눈에 들어 온다.

특히 해질 무렵에는 비양도 뒤로 넘어가는 일몰도 감동적이다.

고려 공민왕 23년(1374년)에 목호(牧胡·제주 목마장을 관리하는 몽골 관리)의 난이 일어나자, 최영 장군이 토벌군을 이끌고 한림읍 명월포에 상륙, 이곳 새별오름에 진영을 구축해 목호군을 섬멸하기도 했던 곳이다.

▲따라비오름=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에 자리한 따라비오름은 `오름의 여왕`이라는 별칭이 있을 만큼 그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이 오름 역시 가을이면 오름 전체가 억새의 은빛물결이 출렁인다.

제주 오름은 굼부리가 하나 있는 원뿔형이거나 한 쪽으로 터진 말굽형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따라비오름은 3개의 굼부리가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크고 작은 여러 개의 봉우리가 매끄러운 등성이로 연결되어 한 산체를 이루며 이곳에서 억새가 가을 햇살과 바람에 은빛 물결을 이룬다.

산체 좌우 탐방로에 나무 계단과 야자수매트가 설치돼 있고 정상까지의 소요시간도 20분 남짓으로 누구나 어렵지 않게 정상에 오를 수 있다.

▲대록산(大鹿山·큰사슴이오름)=따라비오름 이웃한 곳에 대록산이 있다. 이 오름 탐방로 주변 역시 억새 물결이다.

특히 정상을 향하는 탐방로보다는 오름에 오르기 전, 오름 주변 수 만㎡의 드넓은 대지는 가을이면 그야말로 은빛바다를 이룬다.

드넓게 펼쳐진 억새 평원에 햇살이 쏟아지면 눈이 부실정도의 장관이 펼쳐진다. 굳이 힘들게 오름을 오르지 않아도 억새 장관을 감상하기에 그만이다.

따라비오름과 대록산은 `갑마장길`이라 불리는 산책로와 연결돼 있어 두 곳의 억새 장관을 한 번에 볼 수 있다.

▲산굼부리=제주 억새 하면 관광객들에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장소가 바로 산굼부리일 것이다.

산굼부리는 다른 오름들에 비해 높지도는 않고 산세도 험하지 않지만 대형 굼부리를 지닌 오름이다. 마치 몸뚱이는 없고 아가리만 있는 기이한 기생화산이다.

굼부리의 둘레는 무려 2㎞에, 그 깊이는 132m에 달한다.

억새 하나로 제주의 대표적인 관광명소가 된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억새의 명소인 만큼 다양한 종류의 억새를 감상할 수 있다.

산체 전체가 억새물결을 이루고 억새 숲 사이로 탐방로가 있어 마치 구름 사이를 지나는 느낌이며, 정상에서는 구름 위에 서 있는 신선이 된 듯한 기분이다.

산굼부리는 1979년 6월 천연기념물 제263호로 지정돼 있다.

억새 풍경도 장관이지만 분화구 내부에는 일사량과 외부와의 온도 차이 등으로 난대식물과 온대식물이 군락을 이루고 있어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마보기오름·정물오름=제주도민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산록도로 핀크스 골프장 인근의 마보기오름도 억새 명소다.

산록도로변 핀크스 골프장 인근에 `마보기오름`이라는 표지판을 따라 20여 분 오르면 주변 전체가 억새의 은물결에 뒤덮여 장관을 이룬다. 또 이곳에서는 한라산과 산방산, 단산, 가파도, 마라도 등 제주 서부의 풍광이 손에 잡힐 듯하다.

한림읍 금악리의 정물오름도 억새 풍광을 즐기기에 손색이 없다. 무엇보다 인공미가 없는 자연미가 일품이다.

주차장에서 정상까지 약 20분. 오르는 동안 약간의 억새를 볼 수 있지만 정상 뒤편 산 전체가 억새 물결이다.

정상 능선에서 뒤편 산체로 내려가기가 힘들다면 오름을 오르지 않고 오름 주위를 돌아 뒤편으로 가면 어렵지 않게 장관을 감상할 수 있다.

한신협 제주신보=조문욱 기자

사진=제주신보 고봉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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