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적 개인주의인 위아설(爲我說)을 주장한 양주는 갈림길을 만나자 북으로도 갈 수 있고 남으로도 갈 수 있음을 슬프게 여기며 울었다. 모두를 사랑하는 겸애설(兼愛說)을 제창한 묵적도 염료에 따라 실을 노랗게도 검게도 물들일 수 있음에 슬퍼서 울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회남자` <설림훈>에 전하는데, 서로 다른 학설을 주장한 두 남자의 울음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눈물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먼저 맹자와 순자의 학설을 절충한 양웅의 성선악혼설(性善惡混說)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한유는 인간성에 대해서 고찰한 <원성>에서 사람의 성품을 상중하로 분류하였다. 선만 있는 최고의 상품(上品)과 교육으로도 불가능한 하품(下品), 교육에 따라서 결정지을 수 있는 중품(中品)으로 나누어 본 것이다. 맹자가 상품, 순자가 하품이라면 양웅의 주장이 중품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양웅은 사람의 성품엔 선과 악이 섞여 있어서 선을 닦은 자는 선해지고, 악을 닦은 자는 악해진다(人性善惡混, 修其善則爲善, 修其惡則爲惡)고 주장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생각 여하에 따라서 선을 행할 수도, 악을 행할 수도 있다고 본 것이다. 선행과 악행을 결정짓는 주체는 바로 자신이며, 근본은 같지만 선택한 환경이나 본인의 성정·습관에 따라서 선인도 악인도 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결국 선과 악을 구분 짓는 키워드는 나로 인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답게 살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한다. 수천 년 전 공자도 사람을 주제로 상생의 가치를 이야기하며 `사람다움`을 말하였다. 사람다움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됨됨이나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능동적 삶을 살아가는 주체라 할 수 있다. 요즘은 `후마니타스(Humanitas)`라는 이름으로 다양하게 변용되어 쓰이기도 한다. 우리가 사람다움의 가치를 견지하면서 삶을 주재해나갈 수 있는 원동력을 필요로 한다면, 그것은 사람의 본질인 인성(人性)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흔히 인성은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대동대이(大同大異)하게 주창되어 왔다. 인성의 가치는 `대동(大同)`으로 일치하지만, 각자의 주장은 `대이(大異)`할 정도로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됐기 때문이다.

유학에서 선악은 도덕적 가치기준으로서의 당연히 지켜야 할 명제였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하는 생이득지(生而得之)의 당위적 가치로 여겨왔다. 선은 가까이 악은 멀리해야 하는 대상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면서도, 우리는 선을 실천하는 것에는 무척이나 인색하다. 제나라 환공이 야외로 나갔다가 폐허가 된 성곽을 보고 그 연유를 물으니, 야인(野人)이 곽씨의 성곽인데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했기 때문에 망했다고 말하였다. 환공이 그건 사람의 당연한 행동이라며 까닭을 물으니, 곽씨가 선은 좋아하고 행하지는 않았으며, 악은 미워하고 제거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폐허가 된 것이라고 하였다. 선악을 아는 것에만 그치는 것을 경계한 말로, 선은 실천할 때 그 가치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혹자(或者)들은 사회가 흉흉해질수록 인성과 선악의 문제를 운운하며, 모씨(某氏)들은 비인간화된 현실에 순자의 손을 들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사람은 선한 존재인가? 악한 존재인가?`라는 선악 논쟁에 답을 내릴 필요가 없다. 기본적으로 사람은 누구나 호선오악(好善惡惡)의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시대에는 거창한 이론으로 포장된 선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단지 보편적·합리적 이해 수준에서의 자신의 말과 행동에 스스로가 도덕적 가치 판단의 기준을 내려 실천하면 되는 것이다. 앞으로는 선이라고 생각하면 주저하지 말고 욕심내어 행할 것이며, 악이라고 여긴다면 멀리하여 경계하면 그만이다. 선은 탐내면 탐낼수록 개인과 사회는 건강해지기 때문이다.

김하윤 배재대학교 주시경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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