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많은 농산물들을 수입해 먹고살지만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농업국가였다. 농업에는 물이 필요하고 관개시설이 넉넉지 않았던 옛날에는 비가 가장 중요한 수원이었다. 특히 벼농사는 넉넉한 물이 필요한데 우리나라는 장마철에만 집중적으로 내려 그 앞뒤로는 가뭄이 잦았다. 기우제는 길게 건 짧게 건 거의 매년 반복되는 행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기우제가 사실상 연례행사였다. 태종 재위 18년간 1403년(태종 3)을 제외하곤 모두 기우제에 관한 기록이 있다. 나머지 17년 동안은 매년 평균 2-3회씩 기우제를 지냈다.

비에 대한 관심은 멀게는 단군신화까지 올라간다. 환웅은 3명의 신하를 거느리고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 등 비바람과 관계된 이들이다. 삼국시대에도 왕이 직접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도 있다.

기우제를 하면 반드시 비가 내린다는 말이 있다. 미신이라고 코웃음 치는 이도 있겠지만 이는 사실이다. 한번 기우제를 시작하면 비가 내릴 때까지 계속하기 때문이다. 진인사대천명의 정신이다.

조선은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고도화된 행정시스템을 갖춘 나라였다. 측우기나 혼천의 같은 발명품에서 알 수 있듯이 과학적으로도 우수했다. 기우제는 단순히 백성을 미혹시키는 미신만은 아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기우제는 마음 속에 간절함을 품고 비를 기원하는 한편 사회시스템을 정비하는 계기가 됐다. 기우제 동안은 기본적으로 음주나 연회 등을 하기 어려웠다. 전국의 가뭄 상황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백성들의 어려움을 풀고 중앙과 지방의 행정체계도 점검했다. 수랏상에 올라가는 반찬 가짓수도 줄였다. 임금이 뙤약볕에서 제를 올리고 있는 시기라 신하들도 자중할 수 밖에 없었다. 고려시대에도 기우제 때는 국왕 이하 사람들이 근신하고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했다는 기록이 있다.

40%대까지 떨어졌던 충남지역 농업용수 저수율이 50%에 가깝게 차올랐다는 소식이 있다. 바닥을 드러냈던 수로가 빗물로 가득 차자 수확을 앞두고 애가 탔던 농민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다. 비록 기우제는 없었지만 국민 모두가 마음 속에 간절함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올 여름 기록적인 폭염 속에서도 묵묵히 삶의 현장을 지킨 행위가 곧 기우제다.

이용민 기자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