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독립운동 유적지를 가다 ①유관순 열사 유적지

아우내만세운동을 재현한 2017년 아우내봉화제 모습. 사진=천안시 제공
아우내만세운동을 재현한 2017년 아우내봉화제 모습. 사진=천안시 제공
"나는 한국 사람이다. 너희들은 우리 땅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는 바로 너희들이다. 우리들은 너희들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어도 너희들은 우리를 재판할 그 어떤 권리도 명분도 없다."

아우내 장터 만세시위로 부모를 잃었지만 조금도 기개가 꺾이지 않은 유관순열사가 법정에서 한 말이다. 2016년 한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 남녀 86%가 삼일절 가장 먼저 떠오르는 위인으로 `유관순열사`를 응답했다. 18세 꽃다운 나이로 감옥에서 순국했지만 유관순 열사는 많은 이들에게 여전히 삼일절과 등치되고 있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떠나는 `충청의 독립운동 유적지를 가다` 첫 번째 곳으로 유관순 열사 유적지만한 곳이 또 있을까.

키 크고 활달했던 유관순 열사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음력 11월 17일)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옛 지명은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의 작은 마을에서 유중권씨의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이소제 여사이다. 유 열사는 아버지로부터 유교적 전통과 충효정신을 깨우치고 일찍이 기독교에 입문한 가족들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신문화를 접하면서 교육에 대한 꿈과 민족정신을 키워왔다.

어린시절 유 열사는 성경 구절을 한번 들으면 줄줄 욀 정도로 머리가 총명했다고 한다. 유 열사는 공주영명학교 보통과를 거쳐 기독교 감리교 충청도 교구 본부의 미국인 여자 선교사인 샤프여사(s. Alise H. Sharp)의 주선으로 교비장학생으로 이화학당에 수학하게 됐다. 이화학당에는 유 열사의 사촌언니 유예도가 먼저 다니고 있었다. 이화학당에 입학 뒤 신학문을 배우는 것은 물론 종교적 배움을 통해 새로운 변화도 일었다. 유 열사는 학교근처에 있는 정동교회에 다니며 신앙심을 키우고 틈나는 대로 조국과 민족을 위해 기도했다. 유 열사의 깊은 신앙심은 훗날 일제의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순국할 수 있었던 정신적 바탕이 됐다.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의 며느리인 김정애씨는 유관순의 이화학당 재학시절 찍은 사진을 보며 유관순의 생김새에 대해 "저 얼굴처럼 우럭부럭 생기지는 않았다고들 말해요, 얼굴이 희고 복스럽고…… 어깨동무하고 찍었기 때문에 으쓱 어깨가 올라가 찍혔어요. 다른 학생들은 서로 오른쪽 학생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는데 유 열사는 키가 커서 오른쪽 사촌언니 유예도와 어깨동무를 하듯 팔을 올려 놓고 찍었어요. 키가 컸던 거지요"라고 회고했다.

실제로 유관 순열사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을 때 기록했던 수형자 기록표를 보면 신장은 5자 6치, 즉 11자를 30.3cm로 환산하면 169.7cm이다. 조선총독부 관보 제 3226호(1923년 5월 15일)에 따르면 당시 여학생의 평균 키는 4자 98치, 즉 150cm 였다. 유관순 열사는 키가 크고 활달하며 남자 못지않은 배포가 있는 소녀로 알려졌다. 유관순 열사와 같은 이화학당을 다니며 5년간 같은 기숙사생활을 했던 보각스님(속명 이정수)은 "유관순은 지기 싫어하고 고집이 세며 때론 18살의 소녀다운 장난끼 있는 아이였다"고 말했다.

3000여 명 만세함성 가득했던 아우내장터

유 열사는 김복순, 국현숙, 서명학, 김희자 등과 함께 3월 1일 서울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화학당 프라이 교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학교담을 넘어 탑골공원까지 나가 만세를 부르고 돌아왔다. 유 열사는 3월 5일 서울 남대문 앞에서 벌어진 학생단 시위에도 참여했다. 이날 유 열사를 비롯한 학생들은 지금의 남산에 있었던 경무총감부로 붙잡혀 갔다. 외국선교사들이 아이들을 내 놓으라고 강력하게 요구하자 국제여론을 일으킬 수 있는 외국인들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학생들은 풀려났다. 풀려난 유관순 열사는 3월 10일을 기해 모든 학교에 임시휴교령이 내려지자 사촌 언니 유예도와 함께 고향 병천으로 내려갔다.

서울에서 3·1운동을 직접 목격한 유관순 열사는 3월 13일 귀향해 부친 유중권과 숙부 유중무 및 조인원 등에게 서울 3·1운동의 경과 등을 설명했다. 이들은 병천에서도 4월 1일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지령리 교회는 병천 3·1운동의 준비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다. 이 교회 신자인 조병호·조만형·박봉래 등은 독립만세 권유 활동을 전개했고 교회 예배당에서는 4월 1일 만세시위에 사용될 태극기를 제작했다.

병천 아우내장터 만세시위를 주도한 인사들은 3월 31일 밤 자정 병천 아우내시장을 중심으로 천안 길목과 수신면 산마루 및 충북 진천 고개마루에서 4월 1일 만세시위가 열리는 것을 알리는 횃불을 올렸다. 4월 1일에는 시장 입구에서 장을 보러 온 사람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도록 권유했다.

병천 아우내장터에서는 1919년 4월 1일 홍일선·김교선·조인원·유관순·유중권·유중무 등의 주도로 군중 약 3000여 명이 독립만세를 외쳤다. 4월 1일 오후 1시경 조인원이 `대한독립` 깃발과 태극기를 들고서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했다. 이어 유중권, 유중무, 조병호 등이 큰 소리로 독립만세를 불렀다. 군중들도 이에 호응해 독립만세를 부르며 장터를 활보했다.

아우내 장터에서 30m 정도 떨어진 헌병주재소에서 독립만세 소리를 들은 주재소장 고야마 등 헌병 5명은 즉시 출동해 시위를 저지했다. 그러나 헌병의 발포로 2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자 이에 격분한 군중들은 순국자의 시신을 주재소로 운구한 뒤 격렬히 항의 했다. 헌병들과 격투하면서 주재소를 공격했다. 이후 천안에서 출동한 헌병과 보병들에 의해 군중들은 강제로 해산당했다.

아우내장터 만세시위로 10여 명이 순국하고 4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유 열사의 부모도 이때 일제의 총칼에 순국했다. 유 열사를 비롯한 20여 명이 체포됐으며 체포된 인사들 가운데 16명이 재판에 회부돼 옥고를 겪었다. 유 열사는 일제의 계속되는 고문과 체포 당시 입었던 상처 등으로 옥중 생활 1년 반이 흐른 1920년 9월 28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유관순 열사 서훈 상향 언제 실현될까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탑원리 338-1번지 일원 3535㎡는 1972년 10월 14일 `사적 제230호 천안 유관순 열사 유적`으로 지정됐다. 사적지에는 유 열사 생가와 초혼묘, 동상, 유적비 그리고 봉화를 올렸던 봉화터가 있다. 유 열사 사적지는 2015년 20만 4751명, 2016년 20만 6283명, 2017년 20만 6511명이 다녀갔다. 올해도 상반기에 8만 9291명이 유관순 열사 사적지를 찾았다.

천안시는 유 열사의 애국정신을 길이 추모하고 3·1운동의 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1972년 사당을 세우고 열사의 초상을 모셨다. 유관순 열사 사우 추모각에는 일제강점기 결전미술전에 `항마`로 입선한 이력 등으로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실렸던 장우성 화백이 그린 표준영정이 한동안 놓였다. 현재는 새로운 작가가 그린 표준영정이 봉안돼 표준영정을 둘러싼 친일시비는 불식됐다.

유관순 열사 사적지에는 열사의 탄신 100주년을 기념해 2003년 4월 1일 유관순열사기념관이 개관했다. 기념관에는 유관순 열사의 수형자 기록표, 호적 등본, 재판기록문 등 관련 전시물과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재현한 디오라마, 재판 과정을 담은 매직 비젼, 열사의 생애를 닥종이 인형으로 재현하는 등 열사의 출생에서 순국까지 일대기를 살펴볼 수 있다. 하지만 542.7㎡(지상 1층, 지하 1층) 규모의 유관순열사기념관은 3·1운동의 상징인물인 유 열사와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을 폭 넓게 알리고 교육하기에는 협소하다.

천안시는 3·1운동 100주년(2019년)과 유관순 열사 순국 100주기(2020년)을 맞아 국비 14억 원, 시비 22억 원 등 총 37억 3300만 원을 투입해 노후화된 기념관 전시실을 리뉴얼 하고 교육관을 신설하는 `유관순열사기념관 개선 및 증축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지난 5월 공립박물관 설립타당성 사전평가 결과 적정으로 나타나 사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중기지방재정계획 수립 후 내년 기본 및 실시설계를 거쳐 2020년 착공, 같은 해 9월과 12월 기념관 재개관·교육관 개관을 예정하고 있다.

유 열사의 나라사랑 정신을 선양하기 위한 물리적 환경 개선은 본 궤도에 오르고 있지만 정작 서훈 상향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정부 의전규정상 대통령 헌화는 서훈 2등급 이상자에 한한다. 유관순 열사 서훈 등급은 독립장(3등급)으로 대통령이 영전에 헌화조차 못하는 상황이다.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는 유 열사의 서훈 격을 높이자는 청원을 지난 5월 청와대 국민청원에 접수했다. 천안시도 홈페이지와 SNS 등을 통해 유 열사의 서훈 상향 국민청원 참여를 홍보했지만 참여인원은 3만 1255명에 그쳤다.

유 열사 뿐 아니라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독립운동가들에게 그에 걸 맞는 서훈을 부여하고 선양하는 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놓여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숙제이다. 윤평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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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열사유적지 전경 모습. 사진=천안시 제공
유관순열사유적지 전경 모습. 사진=천안시 제공
유관순 열사 표준영정. 사진=천안시 제공
유관순 열사 표준영정. 사진=천안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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