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3.1운동 발자취

1919년 4월 4일 아산시 선장면에서 일어난 `4·4 아산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해 2016년 4월 4일 열린 재현행사에서 참가자들이 태극기를 앞세워 거리만세행진을 하고 있다. 사진=윤평호 기자
1919년 4월 4일 아산시 선장면에서 일어난 `4·4 아산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해 2016년 4월 4일 열린 재현행사에서 참가자들이 태극기를 앞세워 거리만세행진을 하고 있다. 사진=윤평호 기자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의 뜻 깊은 해이다. 3·1 만세운동의 함성이 곳곳에 울려 퍼지기는 1919년 대전·충남·북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제의 총칼에 굴하지 않고 남녀노소 온 민중이 독립을 부르짖던 충청의 3·1운동 발자취를 살펴본다.

대전 인동장터 만세운동 4회 전개, 많은 인사들 순국

대전의 3·1운동은 인동장터에서 나무꾼들이 만세를 외치며 시작됐다. 당시 인동시장은 대전의 발전과 함께 성장한 대표적 시장으로 한국인의 전통적 산물을 주로 거래한 장소였다. 인동시장은 대전의 대표적인 3·1운동 만세시위지로 3월 3일부터 4월 초까지 4회에 걸쳐 만세시위가 전개됐다. 처음은 1919년 3월 3일 나무장터에서 나무꾼들이 만세를 외쳤다. 3월 16일 양사길·장운심·권학도 등의 주도 하에 만세시위가 전개돼 원동 일대까지 확산됐다. 3월 27일에는 김정철·김창규·김현태·조상련·윤명화·박종호·김성현·소홍규·김완봉·김완수 등이 군중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4월 1일은 김직원·박종병 등이 주도해 400여 명 군중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태극기를 흔드는 등 시위를 전개했다. 네 차례의 만세시위로 양사길·박병권 등이 순국하고 임동빈 등이 부상을 당했다. 김창규·김정철·김직원 등 11명은 재판에 회부돼 8월에서 1년 6월의 옥고를 겪었다.

유성에서는 1919년 3월 16·31일 두 차례에 걸쳐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1919년 3월 16일 이권수·이상수 등의 주도하에 이정석 등 200여 명 군중들이 장터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3월 31일에는 200여 명의 군중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일제 경찰의 발포에 투석으로 대항했다.

유성장터 3·1운동 만세시위는 일제 헌병과 수비대 보병들의 무력적 탄압으로 사상사가 여러 명 발생했고 많은 인사들이 체포됐다. 시위를 이끌었던 이권수·이상수는 징역 1년 2월의 옥고를 겪었다.

3월 25일에는 대전군 동면 세천리에서 군중들이 밤 10시까지 횃불만세운동을 전개했다. 3월 28일은 유천동에서 30여 명의 군중이 유천면사무소 앞에 모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3월 29일은 기성면 가수원리 부근 산 위에서 시작해 각 마을의 약 400여 명 군중이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4월 1일은 유성 3·1운동이 주변으로 확산돼 갈마동에서 약 30여 명이 독립만세를 불렀다. 회덕면에서도 오후 8시부터 주민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회덕역 앞으로 집결해 만세를 불렀다. 12시 경에 이르러 헌병들의 강력한 저지를 받았다.

산내 낭월리에서도 면민 400여 명이 독립만세를 부르고 행진했다. 산내 헌병주재소에서는 대전에 응원대를 요청해 파견된 병력과 함께 만세 군중들을 해산시켰다. 3·1운동 이후 대전지역의 농민과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고자 항쟁했다.

충남 3·1운동 타 지역 귀감, 도내 전지역 봉기

충남의 3·1운동은 타 지역 귀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3월 3일 예산에서 시작된 충남의 3·1운동은 천안 아우내장터, 공주 장기·정안, 당진 천의, 논산 강경·연산, 홍성 갈산·홍동·장곡, 연기, 서천, 청양, 아산, 부여, 보령, 금산 등 충남 전역에서 봉기했다.

당진 대호지 3·1만세 시위는 1000여 명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였다. 1919년 4월 4일 송재만·이인정·남계원·남성우 등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전개됐다. 남계원·이대하·남상직 등은 2월 말경 고종 국장 참례를 위해 상경했다가 3·1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귀향해 동지들을 규합하고 만세시위를 준비했다. 면장인 이인정은 `도로수선병목정리의 건` 공문을 발송해 4월 4일 면민을 대호지면사무소로 모이게 했다. 400여 명의 군중이 집결하자 면장 이인정이 연설을 했다. 이어 남주원의 독립선언서 낭독 뒤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정의면 천의장터까지 이동하면서 시위를 전개했다.

천의장터로 가는 도중 참여 인사들이 계속 증가해 천의장터에 도착했을 때는 1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천의장터에 태극기를 세우고 독립만세를 불렀으며 인근 정미면사무소와 주재소 앞에서도 독립만세를 외쳤다.

독립만세를 부르고 돌아가는 군중들에게 일제 경찰이 발포하자 군중들은 일제 순사를 구타하고 주재소를 파괴했다. 이후 서산과 당진 경찰서 경찰과 홍성 수비대 보병이 출동해 탄압작전을 감행했다. 이 시위로 1명이 순국하고 3명은 옥중에서 순국했다. 120여 명이 태형과 징역형으로 악형과 옥고를 겪었다.

예산 고덕면 한내장(대천시장)에서는 1919년 4월 3일 약 1000여 명의 면민들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일제 헌병들은 시장을 돌며 시위 군중들을 제지하고 주도 인물 8명을 연행했다. 군중들이 주재소로 이동해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자 주재소 헌병과 예산에서 지원 나온 보병들이 발포해 사상사가 발생했다. 현장에서 인한수가 순국하자 장문환은 군중들과 함께 순국자 시신을 주재소로 운구하고 주재소장을 구타했다. 이 만세시위로 많은 인사들이 고초를 당했고 장문환은 징역 1년 6월의 옥고를 겪었다.

청양 정산면 서정리 장터에서는 4월 5일 홍범섭의 주도로 시장 군중들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3일에 걸쳐 전개된 만세시위로 약 10여 명이 순국하고 5명이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다. 190여 명 인사들은 태형 의 형벌을 당했다. 홍성 장곡면에서는 1919년 4월 4일, 7일, 8일 세 차례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아산 선장에서는 4월 4일 정수길 등의 주도하에 면민들이 군덕리 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연기 전의면에서는 1919년 3월 13일 이수욱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전개됐다. 그는 2월 26일 상경해 3·1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귀향한 후 신정리 인사들을 중심으로 동지들을 규합하고 태극기를 제작했다. 13일 오전 9시경 이수욱은 갈정리고개(장고개)에서 시장을 보러 가는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는 한편, 12시 40분경 약 150여 명의 군중들에게 연설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도록 주창했다. 일제는 조치원에서 헌병과 철도원호대원 20명을 출동시켜 시위를 진압했다.

충북 3·1운동 격렬, 희생자 다수 발생

충북지방의 만세시위는 전국에서 가장 늦은 3월 19일의 괴산읍 시위로부터 본격화돼 4월 말까지 지속됐다. 충북지방의 만세시위가 뒤늦게 불 붙은 요인으로는 교통 불편, 종교조직 미약, 중앙지도체와 연락 차단, 학생층 역량 미성숙 등이 꼽힌다. 충북지방 만세시위는 격렬함에서는 다른 지역보다 강도가 높았다. 일제의 야만적 발포로 사상자도 다수 발생했다.

청원 미원장터 만세시위는 규모에서 청주군내에서 일어난 3·1운동 만세시위 중 가장 괄목했다. 미원면 용곡리에 거주하는 신경구는 3월 1일 이후 전국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듣고 미원에서도 만세시위를 계획했다. 신경구는 이수란·이용실 등과 장날을 이용해 시위할 것을 결의하고 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제작하는 한편 동지를 규합했다.

이들은 3월 30일 오후 1시경 장터 네거리에 나가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호소하며 10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만세시위를 펼쳤다. 현장에 출동한 일제 헌병이 태극기를 빼았고 군중을 강제 해산시키려 했다. 군중의 규모가 더욱 커지자 앞장섰던 신경구를 헌병주재소에 구금했다. 이에 격분한 시위군중들은 주재소로 몰려가 신경구의 석방을 요구하는 등 더욱 격렬한 시위를 전개했다. 이에 청주경찰수비대의 일부 병력까지 동원해 발포함으로써 현장에서 1명이 순국하고 다수의 부상자와 피해자가 발생했다.

체포된 윤인보·이용실은 징역 1년, 신정식·서정렬은 징역 10개월 이성호·이서구·신성휴는 징역 10월에 처해졌다. 정부는 이들의 공을 기려 이수란·신석구·이용실·신학구·윤인보·성규원은 애족장, 신성휴는 대통령표창, 신정식·서정렬은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괴산장터 만세시위는 고종의 인산에 참배차 상경했던 홍명희가 손병희로부터 괴산의 만세시위를 주도할 것을 부탁받고 뜻 있는 사람들을 모아 3월 19일 괴산 장날을 이용해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3월 19일 괴산장터에는 수천 명의 인파가 몰렸고 홍명희를 비롯한 주도자들은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다음 장날인 3월 24일에는 홍명희의 동생인 홍성희의 주도하에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그는 괴산면 서기인 구창회, 소수면 서기인 김인수 등과 함께 시위를 주도했으나 곧 일제 경찰에 체포됐다.

홍성희가 붙잡히자 분노한 군중들은 대한독립만세를 더욱 높이 외쳤다. 3월 29일 장날에는 오후 6시경 약 1500여 군중이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며 기세를 높였다. 다수의 군중이 경찰과 충돌했다. 만세시위는 이튿날인 30일에도 계속됐다. 이때에도 수많은 군중이 만세시위를 벌이며 경찰서로 몰려가 경찰과 충돌했다. 일제 경찰의 발포로 5명이 순국하고 2명이 부상당했다. 4월 1일에는 다시 1000여 명 시위군중들이 면사무수로 몰려가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전개했다. 1919년 3월 19일 괴산장터의 만세시위는 충북지역에서 본격적으로 만세시위가 전개되는 계기가 됐다. 윤평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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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지역 독립만세운동의 효시가 된 인동장터 만세운동재현행사에서 2017년 3월 16일 광복단체와 주민들이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고 있다. 사진=신호철 기자
대전지역 독립만세운동의 효시가 된 인동장터 만세운동재현행사에서 2017년 3월 16일 광복단체와 주민들이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고 있다. 사진=신호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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