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신다. 별 볼일 없는 작은 마을에서 오신 이 분은 세례자 요한이 나기 전부터 계셨던 분(요한 1,15),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분(마르 1,7)이시다. 죄인 중에 하나로 인간의 모든 죄가 녹아든 물로 들어가신 분께서는 죄인 중에 하나로 온 인류의 죄를 지고 십자가 위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써 구원을 완성하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있었던 일에 대해 마르코는 이렇게 전한다.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때에도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선포하신다. 변모 사건은 이 말이 의미하는 바를 더 자세히 설명해 준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에 이어(마르 8,31~33) 세 명의 제자들에게 특별히 `케노시스` 이전의 모습을 보여주신다. 새하얗게 빛나셨던 그분께서는 계시 말씀인 성경 전체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는 두 인물,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신다. 이러한 놀라운 광경 앞에서 베드로는 말한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 베드로는 하느님의 활동 방식에 대해서 이해를 하고 있지 못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데 있어서 가장 큰 적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것은 안주, 자기만족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신다.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라는 전체적인 틀 안에서 제자들이 본 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나눈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 그분께서 하느님의 마음에 들고 사랑을 받는 아들인 이유가 무엇인지, 하늘이 열리며 결정적으로 계시된 진리가 무엇인지 여기서 알 수 있다.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드러난 그때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엘리야와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시고, 하느님께서는 이를 확증해 주신 것이다. 세례 때 하늘이 갈라졌듯이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마르 15,38)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겪으셨을 뿐 아니라 죽임을 당하셨다. 고난과 죽음은 낮아지는 것이고 나아가 자신이 없어지는 것이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요한 1,3)으신 분께서 죽음을 체험하셨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말씀이다. 가장 높으신 분께서 가장 낮아지신 것이다. 십자가를 통해 들어난 자기 비움과 낮춤은 하느님의 활동 방식이고 이것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살리시며 구원 역사를 완성하신다.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은 가장 큰 계시이자 진리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거처인 초막을 크고, 강하고, 위대한 것들이 아닌 작고, 나약하고, 비천한 것들 안에 두신다. 하느님의 가장 깊고 높은 신비가 십자가 위에서 들어났듯이 우리 인간의 가장 깊고 높은 신비도 여기서 드러난다. 우리는 가장 낮아질 때 가장 높아지고 거룩해 진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우리가 가장 하느님을 닮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강해지기 보다는 약해지길, 부유해지기 보다는 가난해 지길, 능력 있는 사람으로 평가받기 보다는 평범한 사람으로 평가받기를 바래야하며, 승리 보다는 양보를, 지배 보다는 봉사를 선택해야 한다. 생명과 구원을 포함한 모든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시작되고 완성된다. 인간 스스로 이 모든 것을 성취하려는 것은 스스로를 `신`의 자리에 오르려했던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시작하시고 완성해 나가시는 분께 온전히 의탁하며 그분께서 선택하신 활동의 방식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2코린 12,9) 오창호 천주교 대전교구 신부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