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달리 드라마를 챙겨보지 않는 편이지만, 최근 한 드라마 주인공의 매력에 빠져 열심히 주말을 기다리는 중이다. 평소에는 고운 한복을 입고 가마를 타고 다니는 귀한 댁 `애기씨`이기만, 중절모에 검은 복면을 쓰고 지붕 위를 뛰어다니며 친일 인사를 장총으로 저격하는 그 여자는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주인공이다. 드라마의 시대적 배경은 국운이 바람 앞에 촛불과도 같던 시절, 기존의 가치관을 흔드는 새로운 생활양식과 사상들이 물밀 듯 밀려오던 구한말이다.

드라마를 보면서, 집안의 하인들에게 하대를 하는 양반 신분의 여성이면서도 평민들과 더불어 의병활동에 뛰어들고 외국어를 배우며 낮은 신분 출신의 남성과 연애 감정을 느끼는, 그런 여성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그저 어림도 없는 공상일까 생각해보았다. 이러한 설정들이 어쩐지 개연성이 없어 보이는 것은 주인공이 여성이기 때문이다. 남성이라면 자신이 가진 조건들을 뛰어넘는 일이 비교적 가능한 일로 상상이 되지만, 그 시대의 여성이라면 남성에 비해 훨씬 더 많은 한계들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를 뛰어넘어 드라마 주인공이 말하는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여성들이 실제로, 실명을 지면이 넘치게 써내려갈 수 있을 정도로 상당수 존재했다. 오히려 드라마 주인공의 삶이 더 평범해 보일 정도로, 안전한 울타리를 부수고 광야로 뛰어나갔던 여성들이 우리 역사 속에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여성들의 삶은 예상대로 대단히 신산한 고난으로 점철되었으며 그 끝에는 대개 자살이나 객사 등의 비참한 종말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러한 여성들의 이름들 가운데에서도 나혜석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그 시대의 인물이다.

일본의 동경여자미술학교에 유학하여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이름을 남긴 나혜석의 삶은 드라마 주인공보다 덜 스펙타클하지 않았다. 그녀는 화가로서뿐 아니라 여러 예술 장르에 대한 비평가, 자신의 삶과 사회 현상에 대한 날카로운 칼럼을 쓰는 에세이스트로서의 뛰어난 면모를 보이는 인물이었다. 나혜석은 조혼의 풍습에 반대하는 여학생들의 모임을 조직했고, 결혼을 선택하면서는 그림을 그리는 자신의 일을 방해하지 말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으며, 무엇보다 이혼의 과정을 낱낱이 기록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힌 `이혼고백서`를 `삼천리`에 게재하면서 파란을 일으켰다.

그녀는 이 글에서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라는, 당시로서는 놀랄만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으며, 이를 `이 어이한 미개명의 부도덕이냐`하고 개탄하면서,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 글은 나혜석 자신의 이혼 상황이 계기가 되기는 했지만, 당시의 남성중심적 도덕관을 공격하고 여성에게 성적 자기결정권이 있음을 천명한 여성 인권 선언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여성은 남성의 노리개가 아니라 온전한 자체`라는 나혜석의 외침이, `나의 일상은 너의 포르노가 아니다`라는 최근 광화문의 시위문구에서 아직도 메아리치고 있는 듯하다는 것이다. 한 세기가 흘렀어도 나혜석의 글에서, 복면 저격수로 변신하는 여성 주인공의 행보에서 통쾌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은, 구한말에 존재했던 문제들이 여전히 또 다른 형태로 남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윤희 청주시립미술관 학예팀장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