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창주 의사 아들 육의균 옹 인터뷰
1919년 충북 옥천 이원시장 만세운동을 주도한 고 육창주 의사의 아들인 육의균(76·대전 동구 용운동) 옹은 73주년을 맞은 광복절을 앞두고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마음은 매한가지일 것"이라며 "독립운동가들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어떻게 싸웠는지만 알아달라"고 말했다.
육 의사는 마을에서 서당을 운영하던 한학자였다. 그러던 그가 1919년 3월 1일 고종황제의 장례식을 보러 간 서울에서 3·1 운동을 목도한 후 독립운동가로 변모했다.
그는 3월 27일 충북 옥천군 이원면 이원시장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주도했다. 자신의 집에서 광목을 이용해 태극기 3개를 만들었고 이튿날 이원시장에서 독립만세 운동을 이끌던 그는 한 차례 일본 헌병에 잡혔다가 주재소를 탈출했으나 또다시 잡혀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을 받고 공주교도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육 옹의 기억엔 항상 아버지 주변엔 인물들이 많았다. 육 옹은 "9살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독립운동을 하셨기에 가족들과 함께한 시간이 많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항상 아버지의 일에 대해 설명을 해주셨었다"고 회상했다. 아버지가 작고한 후 육 옹의 어머니는 3형제를 키우기 위해 시장에서 생선을 파는 등 온갖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육 옹 역시 중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대전 기계공장에 취업했다.
힘들었지만 독립유공자라는 자부심이 있었기에 육 옹은 견뎌냈던 세월이라고 했다.
그러나 생각 외로 국가의 독립유공자에 대한 예우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독립운동을 했던 아버지의 공적을 인정받기 위해 1963년부터 백방으로 뛰었지만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건 40여 년이 지난 2005년이 돼서였다. 육 의사가 옥천 삼일만세운동의 일등 주역임에도 그가 보도연맹 관련자라는 이유로 빛을 본 지는 10여 년에 불과했다.
육 옹은 "1963년 아버지의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받기 위해 부산 정부기록보존소에 가서 기록을 찾아 서류를 갖춰 정부에 제출했지만 이렇다 할 답을 받지 못했었다"면서 "아마 보도연맹에 관련됐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추정하지만 아쉬웠다. 이후 2005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발족되면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고 말했다.
육 옹은 정부의 다른 복지 시책에 비해 약한 독립유공자 후손에 대한 대우에 대한 아쉬움도 표했다.
"현 정부에서 독립유공자 후손이나 보훈단체들의 희생에 정부가 제대로 된 대우를 하겠다고 하지만 딱히 피부로 느끼는 게 크게 없어요. 보상과 대우를 바라는 게 아니라, 나라를 위해 희생한 독립운동가들의 헌신에 대한 가치를 더 지켜줬으면 해요."강은선 기자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