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70년대 대폿집에 가면 찌그러진 주전자가 일품(逸品)으로 보였다. 동그랗고 예쁘던 양은 주전자는 왜 그렇게 된 걸까? 스스로 일품이 되기 위해 제 몸을 울퉁불퉁하게 만든 걸까? 아니다. 오랜 세월 시달린 인고(忍苦)의 흔적이다. 요즈음 글씨들은 왜 찌그러졌을까? 너무 많이 써서 시달리고 시달린 작가들의 시련의 그림자인가? 이 또한 아니다. 주전자의 찌그러짐은 무위(無爲)이나 글씨의 그것은 유위(有爲)일 게다.

고질금연(古質今姸)의 한 현상으로 보기에는 너무 아쉽다. 청나라 때 중국 서예이론을 집대성한 `선화서보(宣和書譜)`는 "많이 배운 학자들은 붓을 댈 때 하나의 속기도 서법 가운데에 섞여 들어가지 않게 하였다. 이것은 속마음이 그렇게 한 것이다. 요즘 학자들이 글씨가 정교하지 못하고 기운이 병들고 속된 것은 바로 품은 마음 때문에 그런 것이지 법도가 부족한 것이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서예가는 마땅히 품은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한다. 어떻게 바로 할 것인가? 나간 마음을 찾아 길러야 한다.

맹자는 "인(仁)은 사람의 마음이요, 의(義)는 사람의 길이다. 그 길을 버리고 따르지 않으며 그 마음을 잃고 찾을 줄 모르니, 애처롭다. 사람들은 닭과 개가 도망가면 찾을 줄을 알지만 마음을 잃고서는 찾을 줄 모르니, 학문하는 방법은 딴 것이 없다. 그 방심(放心)을 찾는 것일 뿐이다"라고 하였고, "마음을 기름은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니, 그 사람됨이 욕심이 적으면 비록 보존되지 못함이 있더라도 적을 것이요, 사람됨이 욕망이 많으면 비록 보존됨이 있더라도 적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욕심을 줄임이 참 아름다움의 스승임을 알겠다.

참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자연스러움이다. 칸트는 예술은 기예의 산물이지 자연의 산물이 아니라고 하면서 "그러한 산물의 형식에서 합목적성은 자의적인 규칙들의 일체의 강제로부터 자유로워서 마치 그 산물이 순전한 자연의 산물인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 자연은 그것이 동시에 예술인 것처럼 보였을 때 아름다운 것이다. 그리고 예술은 우리가 그것이 예술임을 의식할 때에도 우리에게 자연인 것처럼 보일 때에만 아름답다고 불릴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서예도 유위성은 인정하지만, 무위성이 두드러질 때 더 아름답다. 그러므로 마애각석(磨崖刻 石) 석문송(石門頌)이나 석문명(石門銘)을 높게 평가하는 것이다. 이들은 경정(勁挺)하면서 표일(飄逸)하고, 엄정(嚴正)하면서 관작(寬綽)한 자연스러움으로 신품(神品)에 자리한다. 장자는 자연미를 놓고 "학 다리가 길다고 자를 것인가, 참새다리가 짧다고 늘릴 것인가?" 물었다. 참 아름다움은 자연 그대로여야지 임의로 만들어질 수 없다는 의미다. 어디 서예만의 원리이겠는가. 예술의 본질이 그렇고 삶의 속성이 그렇다.

우주만물이 각각 그들만의 독특한 모양이 있듯이 글씨도 한 자 한 자 나름의 결구가 있다. 생명력 있는 글씨라면 임의로 사지를 자르고 늘리고 찌그릴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하면 장애만 생길 뿐이다. 억지로 꾸미려는 욕심이 마음 그릇을 찌그린 것이다. 마음 그릇을 펴 공간에 신채(神彩)의 재료를 채우자.

신채는 작품에서 느껴지는 작가정신이다. 작가의 품위와 호연한 기운이 글씨를 보는 이의 가슴에 전달될 때 그 작품을 보배롭게 여긴다. 그래서 서예 감상에서 형태보다 신채를 중시하는 것이다. 신채의 재료는 무엇인가? 심신수련이다. 오직 수련에 비례해 의연히 생기는 것이다. 수련하는 몸과 마음은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이다. 심수쌍창(心手雙暢)하면 하나이고, 심장수졸(心將手卒)이라면 둘인 듯도 싶다. 이 둘이 안팎에서 묘합(妙合)했을 때 신채는 빛날 것이다. 마음 그릇을 펴 고아한 신채의 멋을 호기로운 붓질로 뽐내보자.

송종관 서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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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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