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7년 무렵 유길준은 과거제도를 비판하면서 "격물진성(格物盡性)의 학문이라고 하지만, 격물한 바와 진성한 바가 어떤 것이란 말인가. 본래 이용후생의 도에 몽매하니 그 용(用)이 사람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의식을 풍부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으로 어찌 국가의 부강을 성취하고 인민의 안태(安泰)를 이룩할 수 있겠는가…. 조정의 백관에서부터 민간의 글방 서생에 이르기까지 모두 과문(과거)으로 부몰(浮沒)하니, 필경 취생몽사(醉生夢死)하다가 끝내 각성해 깨닫지 못할 것이다"(위키백과)라고 했다 한다.

유길준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1번이며 별칭은 개혁가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분노와 열의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분노는 원하는 것을 얻고 타인을 개선하려는 욕망으로 표현된다. 자신은 높은 도덕적 규범이나 소명과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다. 타인의 행동방식에 대해 지시할 자격이 있다고 느끼며 변화를 향한 열의를 보인다.

그는 1856년(철종 7) 서울 계동에서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유진수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명석하고 독서를 좋아했던 그는 부친과 외조부로부터 한학과 성리학을 배웠다. 특히 노론계 실학자들과 교분이 투터웠던 외조부의 소개로 박규수의 문하에서 박영효·서광범·김옥균·김윤식 등 개화파 지식인들과 교류하면서 개화사상을 갖게 되었다.

1871년에는 향시에 장원을 했으나 당시 횡행하던 시험 부조리 탓으로 여러 번 낙방하자 과거를 포기했다. 대신에 비교적 온건했던 유홍기·오경석 등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급진 개화파인 김옥균 등과는 노선을 달리하는 개화파 지식인으로 성장해 갔다.

1881년 조선정부가 일본에 조사시찰단을 파견할 때 박정양·홍영식·어윤중 등과 함께 일본의 문물을 살펴본 후, 귀국하지 않고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1884년에는 대미사절단인 `보빙사`의 일원으로 미국에 갔다가 그곳에 남아 한국인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되었다.

귀국 후 갑신정변 연루 의혹으로 구금·연금되었던 그는 1895년 `서유견문`을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서양의 근대문명을 조선에 소개하면서 자주적인 개화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갑오개혁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기도 했다.

1894년에는 청일전쟁을 계기로 민씨척족세력과 대립하다가 김홍집·박영효의 연립 내각에 참여했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직후에는 내부대신이 돼 자신의 개혁 의지의 일환으로 단발령을 적극 추진하기도 했다.

1896년 을미내각을 무력화하기 위해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간 아관파천을 단행하면서 그와 김홍집·정병하 등에 대한 처단 명령이 내려지자 그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는 망명지에서도 조선의 식민지화를 막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1907년 귀국 후에는 흥사단을 조직하는 등 교육사업과 국민계몽에 주력했다.

에니어그램 1유형인 그가 열정적으로 의도한 개혁은 쇠락해져가는 조국을 그가 본 근대화된 국가처럼 보존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조치를 다하고자 했으나 국권은 이미 피탈의 길로 들어서 있었다.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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